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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순미 Dec 10. 2024

가련한 여인 '주안'

<나도 루쉰의 유물이다>

자네들은 항상 루쉰의 유물은 보존해야 한다 보존해야 한다 말하는데, 나도 루쉰의 유물이라네! 나도 좀 보존해 주게나!


생계를 위해 루쉰의 장서를 매각할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만류하기 위해 방문한 문화계 인사들에게 본처 '주안'이 던진 말이다. 사는 내내 이방인처럼 소외를 감내했여인이 세상에 대고 비통하게 토해낸 절규다.


'주안' 그녀는 중국 근현대 문학의 중요 인물 루쉰(1881~1936..대표작 아Q정전)의 본부인이지만 단 한 번도 부인인 적 없는 비운의 여인이다. 대문호 루쉰의 인정을 받못한 채 평생 시어머니 양이 자신의 몫인 줄만 알고 살았다. 그녀는 루쉰에게 그저 '어머니의 선물'에 불과했다. 어머니 취향에 맞는 선물이었기 때문에 루쉰의 그림자 안에도 들어설 수 없었다. 루쉰에게 불편한 선물이었던 주안은 일방적 희생과 고립 속에서 생을 마감한 고독한 인물이다.


"나는 그녀를 잘 부양할 뿐 사랑 따윈 모르는 일이네."


라는 루쉰의 고백에서 주안의 가련한 처지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오랜 세월 이름만 남편인 루쉰의 냉대를 견디며 살아온 주안의 심리는 무엇이었을까? 시어머니의 관심과 사랑으로 버티다 보면 언젠가는 루쉰의 마음이 돌아설 거란 실낱같은 희망을 품은 건 아니었을까. 마음속에 켜켜이 쌓인 번민은 어떤 방식으로 해소했을까? 도무지 그 속내를 헤아릴 길이 없다. '루쉰의 아내'라기보다는 '어머니의 며느리'로 살다 간 여인 주안의 헌신은 루쉰 삼 형제에겐 각자의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자양분되었지만 본인에겐 가치 상실의 자괴감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큰선생님(루쉰)은 저를 거들떠보지도 않지만, 저는 저우(루쉰의 본명=저우수런) 씨 집안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 살아서는 저우 씨 집안 사람이고 죽어서는 저우 씨 집안 귀신이니까요. 제 후반생은 어머(루쉰 모) 모실 거예요"


루쉰의 홀대에 폭발한 주안이 대차게 대들어봤지만 소용없는 원망으로 사라졌을 뿐 끝내 루쉰의 인정을 얻진 못했다. 최소한 사후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싶어 루쉰과의 합장을 원했으나 그마저도 무산되 저우 가에조차 묻히지 못한 채 보복사라는 사찰장사 지내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보복사는 저우쭤런(루쉰 둘째 동생. 대학교수. 수필가. 일제 점령 정치에 협력. 중일전쟁 승리 후 반역자로 투옥) 안 묘지로 1948년 매국노 재산으로 몰수되면서 그곳에 장사 지낸 주안 묘지는 문화 대혁명의 사구(구사상, 구문화, 구풍속, 구습관) 타파 운동 때 훼손되고 말았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봉건 혼인의 희생양 주안애통한 심정으로 탄식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루쉰은 '어머니의 선물'을 거역하지 못해 받아들이긴 했지만 방치했다.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루쉰이었지만 어머니의 압력과 당시 관습을 거스르지 못한 채 그 시대 봉건 혼인을 수용하고 말았다. 어머니의 체면과 가문의 필요는 존중했으나 주안에겐 선의의 자상함조차 베풀지 않았다. 전족을 한 여인, 대화가 통하지 않는 여인, 완고한 구식 사고밖에 모르는 여인이지만 고분고분한 천성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흠잡을 데 없이 자신보살폈던 주안. 그런 주안을 수용하지 못하는 마음엔 분명 죄책감이 따랐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정서적, 신체적 거리를 유지했다. 아편에 빠져 피폐해져 가던 중국 국민에겐 정신적 지주였는지 몰라도 주안에겐 차디찬 동반자였다. 지금의 견지에서 본다면 논란의 대목이 되지 않았을까.


신문화 운동에 호응하는 신지식인에게 문맹에다 전족을 한 여인은 낡은 관습에 불과했을 다. 타파하고 도려내야 할 폐단을 곁에 두고 중국의 불합리한 봉건 현실과 유교 사상을 비판하며 개혁과 변화를 촉구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은 모순에 해당되는 일이잖은가. 그의 비판적 시각은 여러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끼치며 근대화를 주도했다. 개혁을 선도하는 루쉰이 전족을 한 부인을 맞이했다는 사실은 숨기고 싶은 개인사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여성 쉬광핑과 동거하며 아들을 낳아 키우면서 주안과 이혼하지 않았다. 그것은 도의적인 책임감(경제적 부담, 사회적 비난)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혼은 여성에게 낙인이었다. 때문에 법적, 사회적 보호막까지 깨뜨리며 전통적 관습의 희생자 주안에게 더 큰 고통을 주는 것만은 피한 것 같다. 결국 주안은 루쉰의 사상과 사적인 삶 사이 괴리였다고 볼 수밖에 없을 듯하다. 


봉건 혼인의 피해자 주안과 루쉰은 서로에게 어떤 의미로 남았을까? "주안은 루쉰을 이룩했다"는 문예평론가의 한 마디처럼 "루쉰은 주안을 살게 했다"라고 말하고 싶다. 당대 사회 변혁의 과도기 사이에서 희생양으로 사라진 주안은 죽을 때까지 루쉰 곁을 원하며 받아들여질 거라고 믿었다. 형식상의 결혼이란 걸 끝내 눈치채지 못한 채 루쉰에게 인정받는 그날까지 평생을 기다린 것이다. 그것이 주안을 살게 에너지가 아닐는지.


'루쉰의 유물'로 절규를 토하는 <나도 루쉰의 유물이다 : 차오리화> 주안의 유일한 평전으로써 세상 사람들에게 잊혔다가 다시 존재를 상기시킨 한스러운 여인의 슬픈 이야기다. "전족 한 쌍에 눈물 두 동이"란 말은 그녀의 처절했던 일생을 그대로 노출하며 흐느낌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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