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무 May 23. 2023

다시 만난 세계

코로나 이후 첫 가족여행

5월의 냐짱 바다는 신기할 정도로 청량했다. 오후 4시쯤이 지나자 턱끝으로 땀을 뚝뚝 흘리게 했던 강렬한 열기가 서서히 식고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불더니 그늘이 없어도 좋을 정도의 선선한 공기가 주변을 에워쌌다. 해가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밤하늘이 깊어지기 시작할 무렵 야외 욕조에 따뜻한 물을 준비해 아빠는 반신욕을 하시도록 안내하고 그 사이 엄마와 바닷바람을 쐬며 걸었다. 이럴 때의 엄마는 이야기보따리가 한가득이다. 오래된 뉴스나 추억 따위를 풀어주며 밤을 촉촉하게 해 주셨다. 어디선가 들리던 음악소리에 왈츠 스텝 기억나냐며 손을 맞잡고 춤을 췄다. 박자만 겨우 더듬는 나에 비해 엄마는 꽤 많이 기억하고 계시며 몸을 가볍게 움직이신다. 고요하고 달달한 시간이 흘렀다.


마지막 돌아오던 날 예상보다 예정해 둔 일정이 일찍 끝나 당황했다. 비행시간까지는 아직 멀었는데 밥을 먹기엔 배가 고프지 않았고 이미 물놀이로 낮을 보낸 탓에 더 할 것이 생각나지 않아 할거리 볼거리를 인터넷으로 검색하며 어설프게 눈을 굴리고 있었다. 그러다 커피나 한잔 하자고 카페에 앉았는데 부모님과 수다를 떨다가 그럴 맥락이 아닌데도 울컥하더니 결국 울음이 터졌다. 아빠도 엄마도 내가 여행을 이끄느라 힘들어서 운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는데 사실 그게 아니었다. 얼른 해명을 하고자 히꺽대며 말을 이었다. 같이 여행 와서 참 좋다고, 그런데 함께할 날이 유한한 것이 아쉽다고, 당신들이 늙어가는 것이 애달프다고.


환갑을 지난 내 부모는 아직 젊지만 또 동시에 노쇠했다. 가족들의 옛 사진 사진을 들여다보자 현재의 모습이 겹친다. 내가 보는 가족의 얼굴은 한결같은데 노년해지는 나만큼 시나브로 그들도 약해져 있다. 우리는 입맛도, 취향도, 대화를 나누는 방식도, 회상의 순간이나 깨달음을 얻는 방법도 다르기 때문에 함께하는 여행은 일면 버겁다. 누가 시킨 적도 없는데 알아서 해야 할 것만 같은 압박을 받으며 허우적대는 백조가 된 나는 삐져나오는 짜증을 애써 감춘다. 특히나 외국에 함께 나갈 때면 영어 몇 마디 할 줄 아는 까닭에 내가 부모님의 보호자가 된 것만 같아 긴장이 된다. 지난 여행 경험을 통해 그게 얼마나 미련한 생각인지 배웠으나 통제하지 못하는 일이 일어날까 두려워지는 마음을 하루아침에 떨치기인 아직 내 내공이 부족하다.


우리는 여행을 통해 무엇을 얻어갈까. 맛난 것을 먹고 멋진 것을 보는 단편적인 감각 정보에는 의의가 없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경이와 감동을 느끼고 그 기억 속에서 추억을 재경험하며 시공간을 넘나드는 자유를 만난다. 그간 혼자 여행을 해도 외롭지 않았던 건 집으로 돌아가 이런 감각을 공유할 소중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에도 생각이 닿는다. 마사지와 망고로 충만했던 엄마는 물론, 여행 직전 감기에 걸려 떨어진 입맛에 여행 와서도 눈앞의 산해진미를 구경만 하시던 아빠도 수영장에서 일어나시며 참 좋다고 하셨다. 나는 입안의 달콤한 사탕을 천천히 녹여먹듯, 방해 없이 누리던 그 행복감을 오래오래 만끽하고 싶다고 또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작가의 이전글 새해계획: 긍정의 순간 기록하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