찐 고구마에 빵까지 곁들이며 어머님들 수다가 한창이었다. 나이 지긋하신 선생님 등장에 수업이 시작되고 적당히 스케치를 마쳤다.
채색이 시작하자 고구마 까드시던 어머님들에게서 느꼈던 친밀감은 억겁의 거리감으로 바뀌었다. 자유자재의 물 조절과 멋진 색감. 그제야 만만치 않은 장비(붓, 팔레트, 종이까지)들이 눈에 들어온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클래스는 수강생들끼리 정기 전시회도 하는 수업이었다. 그림 그리는 데 관심 좀 있던 새댁은 남은 수업을 모두 취소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더 늘기는 어려워요"
한 달 이상 연습한 곡을 들으신 선생님의조언이었다. 이 정도면 훌륭하다 돌려 말씀하셨지만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의 뉘앙스였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매일 아이들과 붙어있으면서도 1시간 이상씩 연습하던 시기였다.
그때 왜 불쑥 10여 년 전 수채화반 어머님들이 생각났는지. 한계가 빤히 보이는 취미를 지켜가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
그동안 거쳤던 여러 취미 중 피아노는 스스로를 설득하는 과정이 가장 오래 걸렸다. 시작하자마자 새 피아노를 사주실 만큼 피아노 치는 딸을 좋아하셨던 엄마. 하지만 10대의 나는 배탈, 감기 등 학원 빠질 온갖 핑계를 찾으며 간신히 체르니 40번을 마쳤다. 꽤 오랜 시간 배웠어도 좋아하는 클래식 곡 하나 없이 싱겁게 끝냈다.
그랬던 피아노를 이 나이에, 내 돈 들여, 배우기 쉽지 않은 타국에서 다시 시작한다니.
그럼에도 서른일곱이면 도리어 산뜻한 출발이 가능할 것만 같았다.
아름다운 음악이 가슴에 남는 나이, 성과를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나이,
스스로조차 뛰어남을 기대하지 않을 나이.
좋아하는 음악을 딱 내 수준으로만 쳐보자 마음먹고 아들의 피아노 선생님께 레슨을 부탁드렸다. 1옥타브 높은 음자리표. 열정 없이 배웠던 시절을 증명하듯 내게 남은 기억력과 실력은 딱 그 정도였다. 모든 낮은음자리표와 음악 부호들이 놀랍도록 새로웠다.
커다란 음표들이 듬성듬성 채워진 어린이 소나티네부터 난관이었다. 음표들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세고 계이름을 적어가며 연습했다. 이래서 공부는 다 때가 있구나. 엄마 말 좀 들을 걸. 부모님의 기대와 애정을 허비해버린값을 나이 서른일곱에 치르고 있었다.
의외로 피아노를 시작하자 가장 신나 했던 건 아들이었다. 본인이 칠 수 있는 쉬운 곡에 쩔쩔매는 엄마 모습이 짜릿했나. 연습을 시작하면 어느샌가 방으로 들어와 공부나 독서를 하는 척? 했다. 등 뒤로 들리는 웃음 참는 소리와 각종 훈수. 아들은 모르겠지. 그런 수치를 감내한 건 연습을 마치고 나갈 때 피아노에 슬그머니 앉던 본인 때문이었다는 것을. 어차피 피아노로 무엇이 되고자 시작한 것이 아니니 같이 배우는 아들의 신랄한 비웃음도, 선생님의 조언에도 마음 다칠 일이 없었다.
그럴 줄 알았으니까.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연주면 괜찮았으니까.
모든 것이 정지된 것만 같던 코시국에는 한 마디 한 마디 나아가며 음악을 만들어 가는 재미에 더욱 심취했다. 나의 어떤 영역이 어제보다 나아가고 있다는 경험. 삼시 세 끼, 아이들의 학습 공백 등 일상의 걱정을 멈출 수 있는 짬. 신기하게도 주어진 역할에 반하는, 쓸모없는 취미에 힘을 쏟을수록 효율 따지는 일상 사이 숨결이 불어넣어 졌다.
배운 지 1년이 지날 때쯤 선생님이 힘겹게 입을 떼신다. “피아노가 주인을 잘못 만난 것 같아요” 어리둥절 쳐다보니 수강생 중 가장 열심히 하는 학생인데 지금의 보급형 디지털피아노가 아쉽다는 말씀이셨다. 그러고 보니 점점 수업 시간을 넘기는 날이 잦아지고 있었다. 피아노에 매료될수록 피아니스트 연주를 공유하고 음악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로, 사제지간 역시 미묘하게 변해갔다.
“다음 곡은 이 곡 어때요?” 조성진이 연주하는 비창 2악장 영상을 보여드렸다. 연주가 시작되자 조성진 뒤편의 오케스트라 단원이 눈을 감고 선생님도 눈을 감으신다. 질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