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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집 Dec 12. 2022

그리운 헬조선

재난에서 위안이 되는 사소한 것들


예고 없이 시행된 10시 통금과 도시 간 이동 허가제. 방콕 대부분의 시설 폐쇄로 최소한의 생필품 구입만 가능했다. 이방인이자 자신의 이름으로는 간단한 행정 업무조차 볼 수 없던 주재원 부인 신분이었다. 남편은 언제든 다른 근무지에 발이 묶여 집으로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르는 상황. 열악한 인프라를 인정하는 듯 태국 정부의 대응은 폭력적으로까지 느껴졌다. 





"세 시간 뒤면 금주령 시행된데!" 





수화기 너머로 지인의 다급한 목소리. 

다시 생각해도 황당한 과잉대응의 백미는 갑자기 선포된 주류 판매 금지령이었다. 평소 술을 즐기지 않았음에도 반사적으로 근처 마트로 향했다. 얼마 남지 않은 TIGER 맥주를 싹 쓸어 담고 계산까지 마친 후 친한 사람들에게 알렸다. 





이미 쟁였다는 분(알면서 말 안 해준 거야?), 

몰랐다는 분(나 아니면 누가 챙겨), 

소주와 맥주를 박스로 샀다는 주당 친구(역시 너야). 





맥주를 양손 끊어지게 들고 걸어오는데 고작 맥주 따위에 드러난 내 밑바닥과 내가 알던 사람들의 캐릭터, 술 좀 사보겠다고 애들 팽개치고 나와 있는 상황이 웃펐다. 대부분의 날들, 거의 모든 정보가 느리고 부정확했다. 낯선 곳에서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은 늘었는데 몰라서 불안했다. 그런 와중에도 아주 사소한 몇 가지가 이상한 시절의 타국살이를 버티게 해 주었다.







화투     


불행인지 다행인지 주문 한 달 만에 배편으로 화투가 도착했다. 주말이면 친한 가족끼리 만나 술과 한국 음식을 실컷 나눠 먹고 아이들은 보드게임을, 어른들은 화투를 쳤다. 통금시간 5분 전까지 치다가 새벽까지 치는 날이 잦아졌다. 치는 동안 아이들이 하나 둘 잠에 들고 치던 사람도 한 사람씩 사라져 잠들던 비현실적인 장면들. 배울만큼 배운 분들이 허리가 끊어지게 몇 시간씩 쳐도 10000원 이상 딴 사람이 없는, 자칫 기이해 보이기까지 한 카드게임에 몰두했다. 



멈춰버린 도시에서 외국인으로 산다는 것은 나날이 무력함을 확인하고 고립되어감을 의미했다. 

그저, 무엇을 하든 그 시간이 지나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단톡방 식료품점      


식당의 오프라인 영업이 제한되자 우습게도 배달업은 호황이었다. 기울어가던 한국식 고기뷔페가 첫 주자였다. 고기뷔페에 있던 육류, 간식, 무쌈, 깻잎, 콩나물 등 식자재를 단톡으로 주문받아 배달해주었다. 한국에서 콩나물 콩 공수해서 길러 먹다가 집 앞에서 콩나물을 받았을 때의 환희를 설명 못하겠다. 어쩌면 평생 몰랐겠지. 콩나물 500그램의 소중함을, 고기에 싸 먹는 깻잎의 황홀함을, 닭갈비와 함께 먹던 새콤달콤한 무쌈의 감사함을. 쉽고, 편하던 것들의 절절함을-


식료품 구입이 쉽지 않았음에도 삼시세끼 해대야 하는 한국 맘들은 뜨겁게 호응했다. 각종 커뮤니티로 연결된 사람들이 끊임없이 초대되고 일본인, 태국인까지 구매에 합세해 규모가 커졌다. 배달 안 되던 맛집들도 너나 할 것 없이 배달을 시작했고 집까지 배달해주는 한국 반찬가게도 속속 생겨났다. 


말 안되게 굴어봐라. 

우리가 멈추나. 

세계 어디서든 재빠르게 적응하고 뭉치는 대한민국 사람들. 



 





책 읽는 아이     

아이들과 종일 투닥거리니 아이들의 독서 루틴이 조금씩 잡혀갔다. 하루 1-2시간 공부, 심심할 때는 책을 잡는 아이. 그 자체가 엄마로서 큰 위안이 되었다. 등교는 못 했지만 교내 도서관은 예약제로 운영되던 시기라 매주 학교 도서관에서 아이가 좋아할 만한 책을 실어 날랐다. 근처에 사는 아이 친구들과도 십시일반 책을 돌려 읽혔다. 시간이 워낙 많아지니 읽는 아이도, 그 아이를 보는 엄마도 책이 주는 즐거움에 흠뻑 빠졌던 시기였다. 아이가 읽은 책 리뷰를 SNS에 남기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이렇게 어려울 줄 그땐 미처 몰랐다.       







통행 제한, 금주령, 영업장 폐쇄가 꽤 오랫동안 급하고 빈번하게 이뤄졌다. 진위를 알 수 없는 소문이 돌면 식료품과 생필품을 사재기하느라 긴 줄을 서고, 아이들과 남편은 장발에 대비해 미장원으로 향했다. 처음 겪는 이 질병에 태국 정부 역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 생활 전반에서 체감되었다. 



방콕에 모인 전 세계 사람들이 우왕좌왕할 때 TV나 기사를 통해 본 고국에서는 한국을 헬조선이라고 했다. 온라인 교육, 물류 배급, 확진자 추적, 의료시스템 전반의 대응들이 훨씬 빨랐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코시국을 겪으며 만들어낸 추억들, 소소한 위안거리로 잘 버티고 있으면서도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커져만 갔다. 


누리고 있어 잘하는 줄도 몰랐던 귀한 내 나라로, 

헬조선이라 오해받는 그곳으로. 


남편의 귀국 시기가 1년도 더 남은 시기였는데 이상한 용기로 마음이 일렁였다. 

이상한 시절이었으니 이상한 마음이 드는 게 정상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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