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플레이리스트가 고정값 이었으니 음악만 틀면 캐롤이 흘러나온지 꽤 되었다. 그리고보니 트리도 11월 중순부터 한 자리 크게 차지하고 있었다. 결혼 15년차, 남편산타는 커녕 특별한 외출조차 없어진 날인데도 해가 지날수록 이 시즌에 집착을 떨고 있었다. 그것도 너무 오랫동안.
방구석에 앉아 뜨끄한 커피 호로록 들이키며 캐롤을 주구장창 듣는 데 완벽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아이들의 선물을 고민하고 어떻게 줘야 올해도 산타 역할을 잘 해낼지 작전을 세운다. 우리 공간에서 편안한 홈파티를 계획해본다. 남편이 엉성히 전구를 두르고 아이들이 만들어온 오너먼트가 덕지덕지 매달린 트리. 가족들이 돌아올 시간에 맞춰 점등하고 자기 전까지 반짝이는 트리를 보는 일이 썩 행복했다. 아이들의 웃음을 곁에서 지켜보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워가는 나날들이었다.
올해는 좀 특별한 크리스마스였다. 친정엄마가 작은 아이 방학에 맞춰 크리스마스 당일에 오셨다. 전날 간소한 홈파티를 치르고 난 후라 피곤했는데 엄마가 되레 성화셨다. 이런 날 왜 안나가냐, 아이들 봐줄테니 영화라도 보고 와라. 못 이기는 척 미리 알아두었던 크리스마스트리가 멋지다는 서울의 한 스팟에 갔다. 어디를 가도 길게 늘어선 줄에 추위에 털부츠에 패딩에 마스크까지 오랜만에 나온 크리스마스의 도시는 숨이 턱 막힌다. 아름답다는 크리스마스 트리를 보면서 타노스의 손가락을 떠올렸으니 말 다했다.
미리 예매해둔 콘서트 공연장에 갔다. 십여년만이다. (요즘엔 자꾸 뭐만 했다하면 기본이 십년) 좋아하는 발라드 가수가 붉은 가죽재킷을 입고 싸이의 노래를 부르며 춤을 췄다. 팬의 도리로 끙-하고 일어나 와-하고 공연에 녹아든다. 남편과 비슷한 나이라는 그는 최선을 다해 어설픈 춤사위를 펼쳤다. 목소리 하나로 신성처럼 떠올라 인기를 누리던 그는 가고, 좋아하는 일을 지키기 위해서 사력을 다하는, 크리스마스는 그저 외국 명절이라고 외치는 솔로중년 남성이 남았다. 그 시간들을 함께 지나며 나이 들어온 가수와 우리부부. 추억이 담긴 아는 노래를 들으며 안도감과 감격스러움으로 마음이 일렁인다. 세시간 동안 따뜻한 곳에서 큰 체력소모 없이 좋아하는 노래 들으니 내 취향의 크리스마스를 조금 알 것 같다.
밤 9시, 공연은 끝났고 저녁은 안먹었다. 이 시간엔 어딜가야하나. 크리스마스이니 자주 먹는 치맥은 사양이다. 외관이 단정한 일본식 선술집에 갔다. 쏟아져나온 듯한 젊은연인들 사이 얼굴이 화사해 보이려고 입은 꽃분홍 맨투맨티셔츠가 유독 튄다. 부랴부랴 음식과 술을 입에 털어넣고 아침으로 먹을 우유하나 달랑달랑 들고 귀가한다. 곱씹을수록 크리스마스에 중년부부 할 수 있는 것은 별 것 없었다. 그런데도 그토록 한참을 기다리며 설레여하는 걸 보면 어쩌면 크리스마스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크리스마스 정서를 누리고싶었 던 것이 아닐까 싶다. 추석이나 설을 기다리시는 부모님들처럼.
우리도 언젠가는 에버랜드 야간퍼레이드도 봤던 것 같고 보신각 타종소리 들으며 인파 속 불꽃놀이도 해본 것 같다. 전생의 일처럼 느껴지는 이맘때쯤의 기억들. 사실 파편처럼 남아있는 그 당시의 느낌은 추웠다, 심란했다 정도다. 남편은 추위에 취약했고 나는 인파를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것을 사려깊게 알아채기엔 해야할 것들이 많았다. 뜨거운 사이임을 증명하기 위해 특별해야 했고 크리스마스에 타당한 그림을 그려야 했다.
15년을 살다 보니 남편은 겨울이면 절대 호주머니에서 손을 빼지 않는 수족냉증의 사나이였고 나는 동네 가본 식당만 주로 가는 모험이 싫은 여자다. 그런 우리가 한 겨울, 크리스마스, 신년 행사 인파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단 것. 나이 어린 여자친구 비위 맞추느라 고생했고 고생하는 그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나 또한 애썼다. 성실한 커플이었다.
전날 너무 무리했다며 피로를 호소하는 남편. 10km를 걸었네, 일요일인데 술을 마셨네, 우리 늙은 걸까, 자긴 아직 그대로인 것 같은데. 시시껄렁한 농담을 시작으로 소파에 앉아 유튜브를 켠다. 옆에 찰싹 붙어 앉아 SNL MZ세대편을 몰아보며 키득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