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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의 아름다운 소도시 여행

가슴아픈 역사에 더욱 반짝이는 도시들

by 정진영


물가 저렴하고, 볼 거리 많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자연에 친절한 사람들과 안전한(폰 잃어버렸다가 되찾음) 관광지들이 어우러진 발칸의 꽃,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아기자기한 소도시 이야기!



1. 모스타르 (Mostar)

스타리 모스트


모스타르는 보스니아 남부의 대표적인 관광지이다. 보통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를 향할 때 잠시 들르는 곳 정도로 많이들 가는 것 같다.


'스타리 모스트'는 모스타르의 대표적인 다리로서 'Don't forget '93' 이라는 문구와 함께 보스니아 내전의 상징이 되었다.


보스니아 내전은 고작 이십 몇 년 전 일어난 일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고 잔인한 전쟁이었다. 전쟁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전쟁범죄들은 죄다 모아놓은 막장 전쟁으로, 당시 동구권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였던 유고슬라비아를 순식간에 발칸의 킬링필드로 전락시킨 계기였다.


보스니아 내전

유고슬라비아에서 세르비아의 기득권과 폭정이 계속되면서, 그에 불만을 가진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는 공공의 적인 세르비아를 상대로 독립선언을 하였고 그에 따라 전쟁이 일어났다. 먼저 독립을 선포한 크로아티아는 세르비아와의 전쟁을 통해 독립 승인을 얻어냈다. 전쟁 도중 세르비아는 크로아티아계를, 크로아티아는 세르비아계에 대한 집단학살, 인종청소를 자행했다.
하지만 세르비아-크로아티아 간 전쟁이 끝나자마자 보스니아도 독립을 선언하게 되었다. 다만 보스니아는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계, 보스니아계(무슬림계)가 뒤섞인 복잡한 민족구성 때문에 상황이 더욱 막장으로 치닫게 되었다. 독립한 크로아티아는 보스니아 내 크로아티아계의 이익을 위해 세르비아와의 협상을 하고 함께 보스니아를 포위하여 집단 학살을 시작하였다.
보스니아의 동쪽에서는 세르비아의 대량 민간인 학살이 일어나고, 서쪽 모스타르에는 크로아티아의 포격이 계속되어 결국 다리는 무너져버렸다.
(물론 보스니아계만 일방적으로 피해를 입은 것은 아님)



그래서 곳곳에 적힌 'Don't forget'이라는 문구는 단순히 내전의 아픔을 잊지 말자는 건조한 뜻을 넘어, 크로아티아가 배신해 보스니아의 등에 칼을 꽂은 사건을 잊지 말자는, ‘분노’의 감정이 들어간 말이라고 호스텔 아저씨가 말해주었다.


하지만 이후로도 현재까지 크로아티아는 무슬림이 대다수인 모스타르를 감싸는 언덕 주위에 거대한 십자가를 세우거나 거대한 크로아티아 국기를 산 꼭대기에 새기는 등 보스니아인 입장에서 '도발'로 느낄 만한 행위들을 계속하고 있었다. (물론 모스타르에도 많은 크로아티아계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강물은 어마어마하게 차갑다




2. 포치텔 (Pocitelj)

강가 언덕 기슭에 자리잡은 작은 마을이다.


마을 위쪽으로 요새가 빙 둘러싸고 있는데 그 아래로 난 마을이 정말 미로같아서 길을 잃어버리기 쉽다.


아직까지도 어떤 역사를 가진 지역인지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50명 정도의 주민이 한철 벌어 1년 먹고산다는 얘기에 필요도 없는 엽서 구매하고 (호구임) 싸고 달고 맛있는 체리나 한 바가지 사먹었다.


요새 꼭대기에서 내려다 본 마을



3. 비셰그라드 (Visegrad)

드리나 강의 다리


군대를 전역하고 여행을 떠나면서 러시아-동유럽-발칸으로 가기로 정한 이유가 몇 개 있었다.


그 중 가장 중요했던 것은 <드리나 강의 다리>를 구경하는 것이었다.


2년 전 겨울, 아무것도 모르고 보스니아에 친구들과 왔을 때는 비셰그라드라는 곳이 있는 줄도 몰랐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답사보고서를 쓰느라 이보 안드리치의 <드리나 강의 다리>를 처음 접하게 되었고, 그 책은 곧 나의 인생 작품이 되었다. 그 다리를 꼭 한 번 걸어보고 싶었다.


<드리나 강의 다리>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유고슬라비아의 작가 이보 안드리치는 그의 작품에 자신의 조국에 대한 따뜻한 사랑을 너무나도 아름답게 녹여내었다.


400년 간 이 다리에서 일어난 수 많은 이야기들—

다리를 건설하는 일이 너무 힘들어 다리를 무너뜨리려다 처형되는 농부의 이야기,

아버지가 주도하는 결혼이 싫어 다리 한가운데서 물에 뛰어드는 처녀의 이야기,

이민족의 침입으로 뿔뿔이 흩어진 가족과 이웃들의 이야기,

홍수로 물이 불어난 드리나 강이 마을의 모든 것을 쓸어가버린 후 절망하고 극복하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

세계대전이 일어나 민족과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미워하고, 갈등하고, 그렇게 증폭된 감정이 결국 포격으로 이어져 다리 중간이 잘려나가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들을 다리 가운데의 '소파'(밖으로 튀어나온 발코니)에 앉아 되새김질을 했다.


‘드리나 강의 다리’에서 읽는 <드리나 강의 다리>


그렇게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바로 그 배경속에 직접 들어가 읽는다는 것은 가장 특별하고 감동적인 문학적 경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베오그라드에서 버스를 탄 후, 오전에 비셰그라드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니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는 키득대고 누구는 호기심 어린 얼굴로 난생 처음 본 동양인(=나)을 구경하고 있는 와중에, 누가 다가와서 뭐라고 뭐라고 하길래 응? 뭐? 하니까 도망갔다...ㅜ


일단 은행에 가서 환전하려고 했는데 나는 외국인이라 지점장실에 들어가서 앉아 얘기를 했다. (지점장 분이 영어를 잘하셨음)


그 분은 본인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 보스니아 돈 뒷면에 그려진 다리를 보여주면서 이게 바로 여기 비셰그라드에 있는 다리다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도 아 그 다리 보러왔다고, 이 책 읽고 여기까지 왔다고 하면서 내 가방속에 있는 <드리나 강의 다리>를 꺼내 보여주었다.


그러자 그 분이 너무 좋아하면서 읽지도 못하는 그 낡은 한국 책을 자꾸 넘겨보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해주었다. 자신의 고향을 대표하는 소설이 전 세계의 언어로 번역되어 읽힌다는 것을 보고 매우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4. 사라예보 (Sarajevo)

늦은 오후의 사라예보에는 골목 구석구석 따뜻한 기운이 퍼져있었다


사라예보는 정말 특별한 도시이고, 내가 다시 보스니아에 와야겠다고 결심한 계기이기도 했다.


사라예보 올드타운의 이슬람 동네


사라예보의 라틴 다리에서 가브릴로 프린치프에 의해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암살 당해 1차대전이 시작된 것은 누구에게나 잘 알려져 있다.


그런 건조한 역사적 사실 너머 사라예보가 얼마나 다양한 문화와 종교가 조화롭게 공존하는지 느낄 때, 한 쪽에서 모스크의 아잔이 울리면서 뒤쪽으로 울려퍼지는 교회의 종소리를 들으며 산책하다 마주친 유대교 회당에 들러 히브리어 구약 성경을 구경할 때의 느낌은 참 묘하고 재미있다.


제 1차대전의 시작, 라틴 다리


하지만 그렇게 공존하기까지 보스니아는 너무나도 많은 아픔을 겪어왔고 그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이를테면 사라예보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스릅스카 공화국의 경계선에 위치해있다. 내전 이후 보스니아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BiH, 보스니아-크로아티아계)와 스릅스카공화국(Republika Srpska, 세르비아계) 두 부분으로 나뉜 연방국가의 형태를 띄게 되었다. 즉,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연방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 스릅스카공화국. 비록 한 국가지만 둘은 민족 종교 문자 모두 다르며 국가 안에서 동등한 지위를 부여받고 있다고 한다.


스릅스카 공화국.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 지역이다.


사라예보 시내 중심에 있는 가톨릭 성당 옆에는 스레브레니차 학살과 관련한 전시관이 있다. (내부촬영 금지)


스레브레니차 학살 추모관. 배너의 사진은 희생자의 관이다.


안그래도 민족구성이 복잡했던 유고슬라비아 그 한 가운데에 있던 보스니아는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긴장이 멈추지 않고 있었다.


보스니아의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 선언이 있고 나서 보스니아 내의 세르비아계는 자신만의 군대를 만들었고(VRS, 스릅스카 공화국군), 그 군대는 세르비아의 지원을 받아 보스니아 동부를 장악했다. 일종의 반군.


그러다 중간에 유엔도 개입하고 이런저런 사건이 일어나다가 유엔 PKO 보호구역이었던 스레브레니차 및 몇몇 동부 도시들을 VRS군이 포위하여 PKO군을 축출하고, 도시 내에 있던 민간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이 때 네덜란드 PKO군은 너무나 무력했는데 이후에 네덜란드군의 책임도 어느 정도 인정되었다(<Nuhanovic case>, 네덜란드대법).


어쨌거나 순식간에 보스니아는 발칸의 킬링필드가 되었고 그 수는 현재까지 발견된 9000명 포함 약 3만 명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VRS의 민간인 학살 이후 시체는 여기저기 비밀리에 묻혔고, 그에 가담했던 전범들은 대부분 종적을 감추었기 때문에 유해를 찾기가 매우 어려워졌다.


유가족 일부의 인터뷰를 봤는데, 기억에 남는 이야기들이 많지만 여기 쓰기 힘들 정도로 끔찍했다. 학살뿐 아니라 특정 집단의 파괴를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제노사이드, 정책적 인종청소 등등 온갖 국제범죄들이 발생했다.


너무 슬프고 마음아픈 전시관이지만 보스니아를 방문한다면 꼭 와봐야 하는 곳인 것 같다.


그르바비차 지역에 위치한 호스텔


그르바비차 (Grbavica)


그르바비차는 사라예보 남부의 한 구역 이름이다.


묵었던 호스텔 뒷마당인데 이 사진을 왜 찍었지...생각해보다가 벽에 'Grbavica'라는 낙서가 눈에 띄었다.


보스니아에 오기 전에 봤던 영화가 바로 <그르바비차>였다.


90년대 내전 도중에 세르비아계 반군은 부대 안에 보스니아 여성들을 데려가 '인종정화'를 한다며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 나서 낙태도 하지 못하게 가두어 출산을 시켰고, 그 수가 최소 2만-5만이었다.


내전이 끝나고 전범재판이 이루어 질 때 강간으로 기소된 이들은 고작 77명이었고 나머지는 아무렇지 않게 사회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은 자신의 출생에 관해 모르는 채로, 어머니들은 숨긴채로 삶을 살아가야 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지금 나와 비슷한 또래들로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디딜 것이다.


'그르바비차'는 그렇게 아이들이 자라나고 자신의 이야기를 깨닫게 되면서 갈등하고 좌절하지만 어떻게든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였다.


피해자들이 자신의 사회로 돌아가 죄인으로 살아가면서 2차피해를 당한다는 게 남의 일 같지 않았다고 생각해서 와닿은 영화, 그리고나서 의도치 않게 보스니아의 한 구역인 그르바비차의 숙소에서 묵게 되었다


보스니아 내전 추모공원. 나이를 헤아려보니 거진 내 나이대였다.


올드 타운으로 가면 '문명이 만나는 곳'이라는 사진 포인트가 있다. 구시가지와 신시가지의 경계에 있는 곳인데, 이 곳에 서서 신시가지를 바라보면 20세기 초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지배 시절의 영향을 받은 유럽식 거리, 뒤를 돌아서면 오스만 투르크 식의 구시가지가 늘어서 있다!


‘문명이 만나는 곳’!



5. 블라가이 (Blagaj)


블라가이에서 유명한 저 집이 어떤 유명한 사람의 집이라고 그랬는데 까먹었다. (별로 임팩트 없었음)


물이 진짜 맑은건 둘째 치고 정말정말 차갑다


시원하겠지 하고 발 담가봤는데 '으앗차가' 육성으로 터져나오면서 바로 발 뺌...


모스타르에 하룻밤 이상을 묵어야 하는 이유가, 블라가이-포치텔-모스타르 벙커-크라비체 를 쭉 들르는 투어 코스가 있고 매우 가성비가 좋기 때문이다




6. 크라비체 (Kravice)

크라비체 폭포


폭포로 유명한데 도착하고 딱 봤을 때 아, 여기가 천국이구나, 에덴동산이구나 했던 곳이었다.


맑은 물 속에 훤히 비치는 작은 물고기 떼와, 풀 사이를 날아다니는 알 수 없는 파란색 벌레들, 그 속에서 첨벙거리며 수영하는 사람들과 나룻배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연인들


천국이었다



7. 기타 보스니아의 모습들


디나르알프스 산맥

덧붙이자면 사라예보에서 모스타르로 가는 길이 정말정말 아름답다.


여름에는 깎아지를 듯한 디나르알프스 산맥의 산세와 그 사이로 유유히 흐르는 옥색의 강물,

겨울에는 모두 눈에 덮인 고요한 계곡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간선버스를 타고 이동할 때는 꼭 창가(사라예보-모스타르 구간 시 오른쪽 창가)를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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