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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타 Feb 24. 2020

당신은 영영 불타지 않고.

타오르던 이유를 기억하고 계십니까.

곁에 아무도 두지 않고, 가만히 벽난로 옆에 앉아 있었다. 불길이 사그라들 때까지, 많이도 울었던 것 같다. 옷자락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어떤 삶을 훔쳐보고 오는 길이다.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처럼 타오르던 초상화 하나를 보고 왔다. 프랑스 문학을 즐겨 읽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나와 같은 첫인상을 느꼈으리라. 아멜리 노통브가 거기 있었다. 《머큐리》, 가장 무거운 바다. 거기에 있었다.

배를 타고 한참은 들어가야 나오는 섬. 그 섬으로 향하는 여인을 떠올린다. 그곳에 가는 이유는, 다른 여인 때문이다. 그곳에는-자신의 의지로는 섬 바깥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미래를 결정할 수도 없는 여인이 있다.

죽은 언니의 운명을 물려받고, 초록의 파도치는 원피스를 입고 앉은 여인. 파도 위로 드러난 목덜미, 그 위로는 그려지지도 보이지도 않은. 얼굴이 지워진 여인.

사교계의 중심에서 모두에게 사랑받던 여인. 불타는 건물 아래에 자신의 얼굴을 묻어두고, 잔잔한 물도 거울도 모두 없는. 얼굴을 지운 여인.

그리고 그 여인과 같이 걷기 위해, 결국 모든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러하기 위해, 섬으로 걸어 들어가는 여인.

나는 그들을 떠올린다. 하젤과 프랑수와즈를, 엘로이즈와 마리안느를 떠올린다. 비록 걸어가는 길이 다르더라도, 두 사람이 같이 해변을 걷는 이유가 다르더라도, 나는 두 여인이 나란히 걷는 모습을 아주 오래도록 보고 싶어서 두 초상이 나란히 떠오르도록 내버려 두는 중이다.

경고 아닌 경고처럼 한 문단을 덧붙여 본다. 이 프랑스 출신 그림들은, 대부분의 프랑스 예술이 그러하듯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누군가는 그 강렬했던 색채만을, 압도적인 음향만을 이야기하며 자리에서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나 우리는 왜 불씨를 끌어안고 있는가. 왜 타오르고 있는가. 불타다 사그라드는 장작 앞에서 왜 여전히 타오르고 있는가.

내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타오르는,


텍스트를 수용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일까. 몇 가지를 떠올리다가도, 역시 가장 처음으로는 번역을 끌어다 놓는다. 작가의 언어에서 독자의 언어로. 독자의 언어에서 세계의 언어로. 모든 개인의 언어는 다르고, 공용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접근할 수 있는 거대한 다리 하나를 짓는 것, 나는 그것을 번역이라고 해석한다.

그렇기에 나는 이 영화를 너무도 사랑했다. 사랑하는 연인들의 밀어, 그 위를 떠도는 상념들. 그 모든 언어들이 타국의 것임을 알면서도, 내 심장박동의 연장선이 되는 기적. 길게 뻗은 박동의 수평선 위아래로 퍼지는 그러한 것.

누가 그랬더라, 번역은 반역이라고 했다. 어쨌든 다리를 건너면서 우리는 텍스트를 왜곡한다. 왜곡된 것이 원형을 우그러뜨리면 반역이 된다. 그러나 그 왜곡조차도 원형을 빛내게 한다면, 그것을 번역이라고 부르지 않을 이유가 없다.

내내, 언어의 원형은 거기에 있었다. 여성이 여성을 사랑한다. 여성이 여성을 바라본다. 여성이 여성에게 이야기한다. 여성의 언어, 사람의 언어. 계급도, 나이도, 과거도 없는 언어로. 그저 소피의, 마리안느의, 엘로이즈의 언어로. 물론, 번역이 세 명의 평등을 이끌어나갈 만큼 완벽했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 사이의 은근한 온도, 뜨거운 것도 따뜻한 것도 미지근한 것도 모두 껴안는 그 온도를 나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어쩌면 이것보다 더 좋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을 보다 보면, 어쩌면 이보다 좋았을 수 없었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는 같이 이 다리를 건넜다. 나도, 언니도, 엄마도, 이모도, 할머니도. 우리 누군가는 한 번쯤, 평생에 한 번쯤은. 불에 타고 있는 과거를 뒤로 하고, 한 번쯤은 이 다리를 건너고 있다. 우리의 언어는 바다 위의 뗏목처럼, 어딘가로 아주 느리게 나아가고 있으니까. 우리는 다 같이, 그렇기에 아주 느리게 다리를 건너고 있으니까.




여인의,


이 영화에는, 남성이 다 합쳐서 10분도 안 나온다. 이름도 나오지 않는 배의 선장과 선원들, 그리고 그림을 배달할 하인. 이들이 엑스트라보다야 조금 더 많이 나올 뿐. 남은 시간은 오롯이 여성의 시간이다. 여성만 나오는 영화는 때로 '도전적이며', '지루하고', '혁신적인' 영화가 된다. 그렇지만, 이와 반대일 때 우리는 아무도 비평에 그런 말을 쓰지 않았는데. 남성만 나오는 영화가 도전적이라고, 남성만 나오는 것은 지루하다고, 남성만을 주인공으로 쓰다니 이건 혁신이라고, 아무도 말하지 않았는데. 어떤 성별의 starring은 새롭다. 도전적이다. 권위에 대한 저항이다. 이곳에서 아주 오래, 함께, 같이 빛나고 있었는데도.

그래서 우리는 빛난다. 영광을 누릴 자격이 있는 이들을 위한 왕좌는 아주 오래 비어 있어서 그 빛이 바랜 것도 너무 오래되었다. 우리는 부지런히 닦고, 광을 낸다. 여성을 위한 자리는 있다. 그들은 그럴 자격이 있다.

그러니까 마지막의 마지막에, 마리안느가 결국 아버지의 이름으로 낸 갤러리에서 "아버님은 여전히 건재하시네."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그 표정을 마주했을 때. 나는 참을 수 없이 사랑에 빠질 수밖에.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뮤지컬 《루드윅》에서 마리 슈라더가 오빠 이름을 빌려 건축 공모전에 자신의 작품을 냈을 때도, 그리고 그게 결국 예선을 통과했을 때도, 여자 옷에 가로막힌 많은 것들이 남자 옷을 입은 그 이후에는 아무렇지 않은 것들이 되었을 때도. 나는 그 때도 울었고, 그 때도 사랑했다. 뮤지컬 《마리 퀴리》에서 마리가 나중이라는 말을 정말 싫어한다고 소리칠 때도, 나중에는 할 수 있는 일을 왜 지금은 못 하느냐고 소리칠 때도, 나는 사랑했다. 어떤 여자들은, 아니. 너무 많은 여자들은, 남자의 이름을 빌려야만 제 가치를 말할 수 있었다. 있었다, 있다, 나는 아직 이 문장의 시제를 정하지 못했다. 나는 오래 고민한다.

그러니까 이 타오르는 불꽃 아래서, 드레스를 다 잡아먹지도 못하는 주제에 뇌리에 남는 이 불꽃 아래서, 우리는 사랑한다.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아니까. 이 이야기의 결말도, 결말까지도 알고 있으니까.



초상.


사람은 사람을 무엇으로 기억할까. 스쳐지나갈 때마다 코 밑에 쌓이는 체향? 안녕, 안녕, 하고 나를 부르는 그 목소리의 높낮이? 뒤로 숨긴 손을 꼭 잡던 그 체온?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마시던 애프터눈티, 그 옆에 놓인 쿠키의 미묘한 맛? 아니면, 나를 두고 저 멀리 도망가는 파도와 당신의 뒷모습?

기억은 쉽게 무너진다. 개인과 개인이 만나서 무너지는 세계는 때로는 아주 깊은 골짜기를, 때로는 아주 높은 산등성이를 만들어내서 나는 이 세계가 원래는 어땠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 기억의, 순간의 한 숨을 멈춰서 기록하는 법. 누구는 그것을 사진이라고, 누구는 그것을 시라고, 누구는 그것을 그림이라고 부른다. 마리안느는 그것을, 초상이라고 부른다.

둘, 혹은 셋의 생을 훔쳐보는 내내 나는 마리안느가 만들어내는 선이 좋았다. 슥슥, 대충 긋는 것 같은데 선이 모여서 면이 되고 면이 모여서 이차원 안에 삼차원을 가둔다. 어쩌면 시간도 그 안에 숨죽이고 있으니까...

한 번의 강렬한 경험은 평생 남는다. 그것을 그대로 복원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신의 축복을 받았거나, 저주를 받았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 그것은 저주다. 그 강렬한 경험과 평생 살 수는 없으니까. 우리는 안다. 여인과 여인의 사랑이, 결혼과 정상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그 사회에서 어떻게 끝나는지 안다. 그들은 도망치지 않았다. 도망쳤다면 판타지였겠지만, 도망치지 않아서 그 삶의 장르는 에세이였다. 내가 아는, 내 어머니가 아는, 내 언니가 아는, 내 동생이 아는, 혹은 나의... 누구든 모두가 아는 에세이. 도망치지 못한다. 도망칠 수 없다. 한순간의 불장난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눈을 가리고 서로에게 뒷모습을 보인다.

엘로이즈는 마치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처럼, 그 문을 사이에 두고 마지막 말을 한다.

가.

그것이 마지막이 될 것처럼. 적어도 그이의 삶에서는 마지막이었으니. 그러나 마리안느는 엘로이즈를 보았다. 가만히, 조용히, 본다. 그 초상을 본다. 28페이지를 영원히 읽는 그 초상을 본다. 우리는 그것을 운명이나 비극이라고 읽지 않는다. 그저 삶이라고 읽는다. 마리안느도 그렇게 읽었고, 건너편의 엘로이즈를 그저 보기만 한다. 본다. 사진보다 더 강렬한 한 순간을 캡처한다.

내가 영원히 사랑하는 사람을, 불꽃을, 그 초상을 지울 수도 없이. 어떤 사람은 한 순간으로 평생을 살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이 정말 낭만주의자의 망상일까? 다들, 영원히 잊지 못할 한 사람쯤은 품을 수 있지 않을까?그것이 섹슈얼이든, 로맨틱이든, 둘 다 아니든 간에. 누구나 한 사람을 떠올릴 수는 있는 법이니까.

에우리디케는 일부러 오르페우스를 불렀고, 오르페우스는 일부러 뒤돌아봤다. 연인이 아닌 시인의 삶을 선택했고, 선택하도록 했다. 당신이 나를 부를 때, 나는 돌아볼 수 있을까. 자신이 없으나 돌아봐야 한다. 우리는 아직, 신화 시대에 살고 있으니까.



내 이야기는 이렇게 끝났다. 나는 삶을 훔쳐보았고, 그것은 너무 서글픈 일이어서, 이 이야기를 더듬더듬 시작하는 데도 마치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어떻게 할 수나 있을까.


사람이 감히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해도 될까. 사랑을 잃은 자라고 누군가를 칭해도 될까.
현실을 만들거나 바꾸거나 없애거나
셋 중 어느 것도 할 수 없다면,
우리는 불씨를 껴안는 것 말고
다른 어떤 것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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