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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타 Mar 02. 2020

김이박이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

김이박이 고등학교에 입학한다.

이상할 때가 있다.


마지막 모의고사를 아직도 기억한다. 2014년 10월, 어느 교육청에서 만든 모의고사였는데. 나는 그 때 수학 4등급이라는 점수를 받고 세상이 무너진 사람보다 서럽게 울었던 적이 있다. 확신하는데, 나는 그 때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내 인생에서, 오늘보다 더 많은 오답을 안을 날은 없으리라고.

그러나 돌이켜보면, 내 인생이 선택한 모든 답들은 틀렸다. 답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그 사실이 두려워서 떠밀리듯 껴안은 그 삶도 틀렸다. 세상의 모든 것에는 답이 있다고 떠들어대는 어른들의 사이에서 주워든 그 삶도 틀렸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상할 때가 있다. 그런데, 누구나 다 그러지 않나?



나는 아무 것도 모른 채로 뛰어드는 것을 좋아한다. 늘 그랬다. 얄팍한 스키마를 가지고서 나는 잘도 자리에 앉았다. 1976년생 김이박과, 1992년생 김이박을 보게 될 것이라는, 무지의 기대만 가지고서 앉았다.

2012년은 어땠더라. 나는 그 때 까만색 이어폰을 양쪽 귀에 꽂고, 에일리의 Heaven을 들으면서 학교로 향했다. 그리고 그 교복. 채도 낮은 오렌지색 마이. 펑퍼짐하던 교복 치마, 우리 지역에서도 몇 안 되던 여자 바지. 몇 년이 지나도 그 조각들은 살아 있을까?

조명이 꺼졌다. 김이박이 잠에서 깨어났다.


김이박은 1976년 태어나, 1992년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김이박은 1992년 태어나, 2008년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김이박은 어른들한테 사랑받는 법을 배웠다. 늘 웃어라. 너무 크게 실실대지는 말고, 여기 이 끝까지만. 하루에 같은 사람을 열 번 만나면 열 번 인사해라. 말 많이 하면 안 된다. 늘 네네, 하다가 공부에 관한 것만 은근히 이게 맞는 건가요? 하고 물어보렴. 막내삼촌은 그렇게 사는 김이박을 싫어했다. 정작 본인도 아버지에게는 슬슬 기고, 어머니한테는 막 대했으면서. 그러나 김이박은 막내삼촌으로부터 핑크플로이드, 레드제플린, 롤링스톤즈, 도어즈... 그러니까 지금의 김이박에게는 오래 전 사람 같은 이야기들을 배웠다. 그는 인간실격을 사다줬고, 다자이 오사무를 좋아하도록 이끌었다. 사회에 불만이 많았고, 부적응자였고, 닿아본 적 없는 다른 세계를 보여줬다.

막내삼촌은 자살했다.


김이박의 학교에는 대걸레에 대한 소문이 돌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하두리로 몸캠을 했다더라. 그래서 그게 인터넷에 다 퍼졌다더라. 학교 끝나면 오빠들이랑 아니면 아저씨들이랑 그걸 한다더라. 원조교제도 한다더라... 그 '대걸레'는 조용한 아이였다. 매일 잠을 잤다. 그러나 전교생이 다 그 아이를 알았다. 이름이 아니라, 대걸레로 알았다. 그 아이는 자퇴했다.

고 3 때, 그 아이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누군가는 교통사고였다고, 누군가는 성병이었다고, 누군가는 그냥 죽었다는 소문만 돈 거라고 했다. 아이들은 울었지만, 야자를 했다. 고3이니까. 대학 입시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니까. 그러니까, 대학 가면... 그 때 반 아이들은 그 애를 어떻게 불렀더라. 김미진이라고, 이름을 불렀나? 아니면, 대걸레라고?


누군가의 죽음은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하루하루가 쌓여서 인생이 되고, 그 인생이 대학을, 미래를 결정한다고 했다. 김이박은 울었다. 울었지만, 삶은 끝나지 않았다. 김이박은 여전히 학교에 갔다.



선생님은 가끔 몇몇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깨를 토닥이고, 등을 쓸어내렸다. 가끔 이너와 브래지어의 끈을 맞추라고 잔소리를 했다. 팔을 조물조물하면서 잠을 깨운다고 했고, 애들은 다들 그걸 사랑이라고 여겼다. 어떤 선생님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기를 바라기도 했다. 그러나 계기 같은 건 아주 우연히, 우연히 찾아온다.

김이박의 담임은 이진수 선생을 콕 집어서, 그가 한 성희롱 발언을 적어내라고 했다. 상황을 파악하고 학교에서 적절한 시정조치를 하겠다고. 아이들은 적었고, 이진수는 잘렸다. 그러나, 그러나... 아이들은 이진수가 운동권이어서 잘린 거라고 했다.

나시 끈과 브래지어 끈을 맞춰야 한다고 어깨를 만지던, 지도를 한다는 핑계로 학생들 가슴을 만지던, 수업시간에 조는 학생에게 밤일 뛰고 왔냐고 말하던, 그 선생들은 잘리지 않았으니까. 학교는 이진수만 콕 집어서 물어봤으니까. 아이들은 계속 학교에 다녔다.


어느 날, 학교에 없던 캐릭터도 등장했다. 정성태, 20대 후반의 초임 교사였다. 그는 한쪽 어깨에만 실리는 가방의 하중이, 운동화 대신 신어야 하는 검은 구두가, 활동성이 떨어지는 짧은 치마가 아이들의 학습권을 방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아이들은 저 선생이 잘리려고 그러나, 걱정을 했는데 정성태는 그렇게 말했다. 너희도 주체적으로 목소리를 내렴.

주체적으로? 아이들은 당황했다. 아이들은 늘 그런 말을 들어왔다. 목소리를 내는 것은 중요하지. 대학 가고, 졸업하고, 어른이 되면. 지금은 공부를 할 때야. 늘 침묵하고 순종하는 것을 배웠고 강요받던 아이들은 웅성거렸다. 그러나 믿기 어렵게도 아이들은 이제 두 어깨에 가방을 메고, 운동화를 신었다. 아이들은 정성태에 열광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고3 언니에 대한 소문이 퍼졌다. 정성태랑 잤다고, 아이들은 금방 그 언니에 대한 소문을 지어냈다. 원래 인기 많았다더라, 원조교제도 한다더라, 그 고3 언니 이름도, 몇 반인지도 확실하지 않지만 야하게 생긴 타입이라더라...



학교는, 사회는, 언젠가 큰 활을 들고 자신들을 겨눌 약자들을 두려워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지 못하도록, 원망과 비난의 화살을 같은 학생에게 쏟기를, 같은 여자에게 쏟기를 바랐을 것이다.


여자가 예쁜 것만 중요한 것 같니? 행실이 중요하다. 네 주위 사람들이, 남자들이 다 네 행동거지를 지켜보고 있다.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여자가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지 않느냐. 어? 공부 잘 해서 좋은 대학 가고, 좋은 직장 갖고, 좋은 남편 만나고...


스스로의 행동을 검열하고, 또 검열하고, 원하는 것이 남자의 옆자리이기를, 그 누구보다도 바라왔을 것이다. '여자라서' 영악하게 군 것이 아니다. 그 어느 집단에서든 정치와 편가르기는 있다. 하지만 이 집단이 여고이기 때문에, 그놈의 여자고등학교이기 때문에...


하지만 나는 안다. 내가 배운 것은, 내가 겪은 것은 상대방이 여자여서가, 청소년이어서가 아니었다. 내가 부딪히고 울었던 이유는 사람 때문이었다. 내가 갈망했던 것은 사람이었다. 목소리를 내는 방법을 잃어버렸던 너무 많은 아이들이, 하나둘 목소리를 냈을 때 그래서 나는 울었다. 내가 겪은 일도 아닌데 나는 그 순간이 너무 선명해서 울었다. 인생에서 3년은 결코 찰나가 될 수 없다. 눈을 아무리 감았다 떠도 시침이 달리고 있지는 않다. 우리는 아주 느리게 헤엄치고 있었다. 뻐끔뻐끔, 물고기처럼 입 밖으로 소리내지도 못하게. 물 위로 튀어오를 수도 없게.



하지만 보아라. 우리는 튀어올랐다. 우리는 목소리를 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것은 폭력입니다. 우리는 폭력에 오래 침묵하다가, 어른이 된 그 순간 목소리를 내라고 강요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오랫동안 죽어있던 시체는 한순간에 살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어른이 뭐라고. 열아홉과 스무 살이 뭐 얼마나 차이난다고. 교복과 사복이 얼마나 차이난다고.

우리는 강당 밖으로, 운동장 밖으로 뛰쳐나간다. '여자고등학생'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절대 '여자고등학생'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입니다. 우리는 약자를 헐뜯도록 가르치는 이 교육을 수용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비난하도록 유도하는 이 교육을 수용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는!


어차피 지나갈 시간이었다면 왜 그렇게 아파야 했는가? 어차피 겪어야 할 시간이었다면 왜 그렇게 무기력해야 했는가? 우리는 모두 자영 언니처럼 살기를 강요받는다. 그러나 그 침묵은 온당한가?



이상할 때가 있다.


김이박이 수능 응원 이벤트로 반 애들과 다 같이 소녀시대 노래를 연습하는데, 그 헐떡이는 호흡을 보는데, 나는 울었다. 왜 울었는지 모른다. 다른 관객들이 다 웃고 있는 그 순간에, 나는 울고 있었다.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제 안녕

널 생각만 해도 난 강해져

울지 않게 나를 도와줘


그 때, 이화여대 벗들의 외침이 겹쳐 보였던 건, 전혀 다른 순간들이 노래 하나로 빙글빙글 돌다가 쾅 폭발해 버렸던 건, 왜였을까. 그 알 수 없는 연대가, 막연히도 그립고 외로웠던 건 정말 왜였을까. 나는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계속 한 문장으로 정의하려고 질문을 반복하고 있었다.


우리 모두는 김이박이었으니까. 그렇지.

산돌극장의 소녀시대, 마돈나, ...아니, 그냥 김이박들.



김이박은 1996년 태어나, 2012년 고등학교에 입학한다.

김이박은 2004년 태어나, 2020년 고등학교에 입학한다.



정말 이상할 때가 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의 행복과 공의를 응원할 때가 있다. 그이들의 투쟁과 변화를 무조건적으로 지지할 때가 있다. 그런데, 누구나 다 그러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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