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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동주 May 18. 2020

'사자' 믿음이라는 것

 누군가를 항상 같은 시선과  한결같은 믿음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어렵기만 하다. 심지어 한번 어긋 날경우 자신의 믿음에 대한 배신감은 그만큼 커질 수밖에 없고, 배신감은 커질수록 상대에 대한 증오로 변하기 마련이다. 


 어릴 적 경찰인 아버지를 따라서 매일 같이 기도를 드리는 용후는 가진 것은 많이 없지만, 아버지와 둘이 행복하게 살고 있다. 하지만 범인을 쫓던 아버지는 그만 순직하게 되고, 기도를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자 신을 원망하면서 할머니와 단 둘이 크게 된다.


 공포라는 장르는 쏙 빼놓고 왈가왈부해야 할 영화. 오컬트와 액션의 장르를 혼합 해 놓으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느낌이다. 인물들의 설정 또한 공들인 노력이 보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어설퍼 보인다. 보통은 신을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 범인을 증오해서 범인을 찾으려다가 악마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을 알고 난 후, 고군분투하는 것이 어쩌면 좀 더 매끄러울 수 있겠다. 십자가를 내던지며 변기통에 십자가를 버리려고 했던 주인공이 믿음이 가장 강했던 '선택받은 자'라는 것  어불성설이다.


 중반까지는 오컬트 영화가 그렇듯 구마 의식을 보여 주지만, 긴장감이 떨어진다. 배우 박서준이 맡았던 '용후'라는 배역이 어차피 어떻게 할 것인가가 예상이 되니 긴장감이 떨어질 수밖에. 구마 의식의 과정은 단조롭게 흘러간다. 안 신부님이 당하면 용후가 나타나서 한 번에 해결해버리는 방식. 이쯤 되면 액션신도 궁금하지만 원테이크 씬으로 촬영된 클럽 액션 장면에서도 이렇다 할 액션을 선보이지도 못했고, 지하에서 지신과 각성 후 대결 장면 또한 주고받는 형식의 액션이라 아쉬울 따름이다.


 영화 속 용후는 믿음을 통해 믿음이 배신감으로 변질되고 증오로 발전하였지만, 믿음이라는 것이 굳이 종교적으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영화 속 아버지와 어릴 적 용후의 관계라는 과거의 믿음은 결국 지나갔, 현재의 안신부와 유사 부자관계를 통해서 현재의 믿음을 보여주었다. 지신이 안신부와 떨어뜨리려고 이간질을 하는 장면도 있었는데, 결국 안신부를 굳건히 믿음으로써 안신부를 택하게 된다. 이렇듯 신이 아닌 서로를 믿는다는 것은 정상에서 커다란 바위가 떨어지지 않도록 반대 방향에서 같은 힘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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