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년세세』 황정은
제목이 “연년세세”라니, 자극적이고 도발적인 제목들이 가득한 요즘 세상에 작가는 어떤 생각을 품고 있을까 궁금했다. 황정은이라는 작가를 잘 모르기에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궁금증만 더해갔다. 흔치 않게 한자도 덧붙였다. 요즘 너도나도 영어 이름 붙이기에 정신이 없는데, 왠지 정감이 간다.
연작소설이라는 형식도 매력적이다. 저마다 홀로 있어도 충분한 이야기들이 어떻게 서로 얽혀 있을까, 또 어떻게 중심을 잡을까 더 궁금해져 책을 펼친다. 책은 <파묘>, <하고 싶은 말>, <무명>, <다가오는 것들> 이렇게 네 가지 제목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들이 엮여 있다.
첫 번째 이야기는 <파묘>다. 일흔둘의 이순일은 부모를 대신해 자신을 키워준 할아버지 묘에 마지막 인사를 한다. 먼저 도착한 인부들이 파헤쳐 놓은 봉분에서 마주한 건 뼛조각 몇 개가 전부다. 인생은 그렇게 뼈 빠지게 살다 흙으로 돌아가는 건가 보다. 이순일에게 할아버지는 밉고도 고마운 분이기에 가슴 아픈 일이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한세진이 무람한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그런데도 우리는 왜 그렇게 기를 쓰고 살아갈까. 한쪽에선 일과 삶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 5일을 넘어 주 4일 근무를 내세우지만, 실제 현장에선 일자리가 있는 게 다행이라며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일만 하는 사람이 여전히 대다수다.
두 번째 이야기 <하고 싶은 말>은 이순일의 큰딸 한영진이 주인공이다. 한영진은 유능한 판매원이다. 고교 졸업 후 하릴없이 주저앉은 집안의 맏이로 식구들을 먹여 살렸다. 엄마 이순일은 그게 미안해 딸이 언제 오든 새 국과 밥을 해서 따뜻하게 먹인다.
한영진은 자기 앞가림도 제대로 못 하는 동생 한세진이 못마땅하고 언제 독립할지 모르는 막냇동생 한만수가 답답하다. 그들은 왜 자신처럼 열심히 살지 못하는가. 인생은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한영진은 엄마에게 물어보고 싶다. 왜 자신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느냐고. 하지만 물어보지 못한다. 한영진은 그 숙제를 풀 수 있을까? 대한민국 맏이들의 아픔이자 아킬레스건일지도 모른다.
나는 둘째여서 맏이의 삶을 살아보지 않았다. 엄마에겐 오빠가 장남이자 남편이자 동아줄이었다. 지금도 엄마는 오빠 바로 옆에서 꼭 붙어산다. 그런 엄마에게 오빠는 한영진처럼 물어보고 싶지만 차마 할 수 없는 그런 말이 있을까. 나도 물어볼 수가 없다. 감당할 자신이 없기에….
세 번째 이야기 <무명>에서는 다시 이순일이 주인공이다. 이순일은 흔하디 흔했던 이름 ‘순자’를 자기 이름으로 알고 살았다. 이순일은 어려서 부모를 잃고 이 집 저 집 전전한다. 이순일은 지지리도 궁했던 삶을 물려주기 싫어 자신의 원가족 이야기를 식구들에게 뻥긋하지 않는다. 그래야 자식들이 대대손손, 연년세세 행복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내 엄마는 30대 중반에 남편을 잃고 혼자서 삼 남매를 키웠다. 우리가 남들에게 얼굴 들고 살려면 공부를 잘해서 대학에 가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엄마에게는 그게 삶이었고 행복이었다. 엄마는 의사, 변호사, 판사처럼 ‘사’ 자가 붙은 사위를 원했다. 내 행복을 위해서라고 했다. 그래야 엄마가 좋다고 했으면 고개라도 끄덕였을 텐데 엄마는 늘 ‘너네’를 위해서라고 했다.
마지막 이야기 <다가오는 것들>은 둘째 딸 한세진과 동거인 하미영 이야기다. <다가오는 것들>은 100분 짜리지만 하미영이 천천히 쉬어 가며 두 시간 반이나 걸려 본 영화다. 하미영은 너무 빨리 화면이 지나간다고, 배우는 너무 빨리 살아간다고 힘겨워한다. 하미영은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학대당했다. 그저 잊으라는 말로 모든 것을 덮으려는 아버지 때문에 더 괴롭다. 하미영은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으려다가 실수를 반복하고 스스로 정신과에 입원한다.
『헤르만 헤세의 나로 존재하는 법』에서 헤세는 신경정신과 의사들은 작은 불편이나 자극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을 정신적으로 병들었다 하고, 오래 짓밟히거나, 더러운 공기에도 아무 불편을 못 느끼는 사람을 건강하고 정상이라고 여긴다고 말한다. 우리 중 누가 정상이고 누가 비정상일까.
이 작품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가족을 위해 희생하거나 가족 때문에 아픔을 겪었다. 그런데 작가는 후기에서, 이 글이 가족의 이야기로 읽힐지 궁금해한다. 나는 엄마와 딸이 등장한 처음부터 가족의 이야기라 생각했다. 작가는 가족의 의미를 다르게 생각하는 걸까. 그래서 이미 잘 안다고 생각하는 단어 ‘가족’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봤다. ‘주로 부부를 중심으로 한,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집단. 또는 그 구성원. 혼인, 혈연, 입양 등으로 이루어진다.’라고 되어 있다.
어느 곳에 방점을 두는 가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집단, 또는 구성원에 방점을 찍고 읽으면 엄마와 딸, 언니와 동생이 서로 주인공이 되어 글을 이끌어가니 가족 이야기라고 보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부부를 중심으로 한’에 방점을 두니 묘해졌다.
이 글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어머니 이순일과 아버지 한중언, 큰딸 한영진과 그 남편 김원상과 아이 둘, 작은딸 한세진, 그리고 막내아들 한만수다. 뒷부분에 이순일의 이모와 그 아들까지 등장한다. 그런데 이 글 어디에도 남편, 또는 아버지, 아들의 이야기는 중심에 들어오지 못한다. 아버지는 무능력하고 아들은 아직 어리다. 대학을 졸업했지만, 여전히 막내다. 딸의 집을 보아도 남편 김원상은 아내를 우습게 여기며 처가 식구들을 존중하지 않으면서도, 집안 대소사에 전면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주변인에 불과하다. 부부가 중심인 집단이 아니라 여성이 끌어가는 집안에 어정쩡하게 끼어있는 존재들이 남자들이다. 그래서 부부 중심의 집단으로 보자면 하자가 많다. 또한 마지막 이야기 <다가오는 것들>의 하미영과 한세진은 함께 여러 해 살아왔으며 그 누구보다 끈끈한 관계다. 이 두 사람은 가족이라 해야 할까? 아니면 피를 나누지도 결혼한 부부도 아니니 가족이 아니라 해야 할까?
작가는 점점 달라지는 가족의 모습을 여러 시선으로 보려고 했다. 20세기까지는 너무도 당연했던 가부장적인 가족의 모습이 점차 해체되고, 한 부모 가족, 조손 가족, 입양가족, 동성 가족 등 다양한 가족이 등장한다. 전통적인 의미로 피를 나누었다고 무조건 가족이라는 생각보다는 지금 나와 함께 하며 한솥밥을 먹으면서 정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는 이들이 진짜 가족이라는 생각으로 점차 기울어 간다.
가족의 모습과 기준은 앞으로 또 어떤 모습으로든 달라질 수도 있다. 하지만 외형적인 형태는 달라질지라도 서로를 염려하는 그 마음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존속하는 한 연년세세 변치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연년세세 #황정은연작소설 #창비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