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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운트 May 24. 2023

어디든 갈 수 있는 공항이 지옥이라고?

《지옥》, 가스파르 코에닉


천국 또는 지옥 같은 사후 세계를 상상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웹툰 원작의 영화 <신과 함께>가 우리 전통 신화를 바탕으로 한 저승을 그려냈고 단테의 《신곡》 역시 서구의 기독교적인 세계관에 입각한 사후세계를 노래한 작품이죠. 프랑스의 작가 가스파르 코에닉의 소설 《지옥》은 단테의 《신곡》을 트렌디한 음악과 화려한 앵글로 리메이크한 듯한 느낌이라고 할까요, 상상해보지 못했지만 상상해볼 법할 현대의 사후세계를 그려냅니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현대 사회의 여러 시스템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해오던 한 남자가 죽음을 맞습니다. 스스로 '흔하디흔한 죽음'이라고 말하죠. 그리고 사후 세계에서 눈을 뜬 그는 끝이 보이지 않는 무빙워크를 타고 공항에 도착합니다.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수많은 사람들, 면세점과 항공사 카운터, 세계 도시들의 이름이 명멸하는 운항 현황판... 익히 알고 있는 바로 그 세련되고 쾌적한 공항에서 망자로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이곳에서 그는 쉬지 않고 여행을 하고 한도가 없는 신용카드를 쓰면서요. "실제로 저승은 생각보다 훨씬 더 익숙하고 훨씬 더 불가해한 곳"이라는 표현이 딱 맞겠네요. 익숙하지만 불가해한 그곳이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라는 사실은 곧 밝혀집니다. 무한하다는 것은 곧 출구나 끝이 없다는 뜻이라는 것도요.



"나는 죽음에 대한 가장 끔찍하고 가장 은밀한 비밀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끝나지 않는 빚이었다." - 본문 중에서



유머러스하면서도 신랄한 비판과 통찰이 돋보이는 재미있는 소설입니다. 가스파르 코에닉은 철학자, 경제학자이면서 여러 소설을 발표해오고 있고 이 작품은 공쿠르상 최종 후보에도 노미네이트 되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공항 특유의 풍경에 매혹되었다가 점점 한시도 쉬지 않고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탈출하지 못하는 공포마저 느끼게 하는데요, 지적이면서도 실험적인 이 소설을 만나보시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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