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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푸리 Jun 02. 2020

아이돌 팬싸에서 생기는 일

들어가기 전에 미리 밝혀두자면, 나는 아이돌 팬싸(팬 사인회)를 간 적도 없고 앞으로도 갈 생각이 없다. 그럼에도 팬싸에 대해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건 아이돌로서의 자아, 그리고 아이돌과 팬의 특수한 관계가 팬싸라는 행위를 통해 극대화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팬싸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건 다시 201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듀2로 데뷔한 워너원이 앨범을 낸 후 팬싸를 한다는 공지를 보게 되었다. 곧이곧대로 사인회장에 가서 단순히 앨범에 사인을 받는 것이라 이해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런데 이후 트위터를 통해 올라온 후기와 홈마의 사진으로 본 팬싸는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팬싸는 일대일로 아이돌과 얼굴을 마주한 채 말을 나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자리였고, 덕후는 이 흔치 않은 기회를 야무지게 활용했다. 


앨범이 발매되면 이렇게 팬싸 공지가 뜬다.




아이돌 팬싸는 보통 100명 정도의 팬을 대상으로 단상 위의 가로로 긴 테이블에서 진행된다. 일렬로 앉아 있는 아이돌의 맞은편에 의자가 놓이고 팬들이 한 칸씩 이동하면서 멤버 한 명 한 명과 마주하게 되는 구조이다. 질문은 빠른 진행을 위해 직접 말하는 것이 아니라 포스트잇에 답변을 고를 수 있는 형태로 써야 하고(예를 들어 탕수육 찍먹 vs. 부먹), 사전 검열을 받아야 하며, 자신의 차례가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넘어가실게요’라는 팬 매니저의 재촉을 받아야 하는 등 꽤 야박하게 진행된다. 하지만, 최애의 실물을 코앞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덕후는 이를 기꺼이 감수한다. 어떤 아이돌 팬싸의 경우엔 의자 없이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옆으로 이동해야 하는 굴욕도 감내해야 한다.  


팬싸는 홈마가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촬영이 금지된 팬미팅이나 콘서트, 경호원을 피해 뛰면서 촬영해야 하는 출퇴근 길과 달리, 실내의 고정된 자리에 예쁘게 앉아 있는 아이돌을 마음껏 찍을 수 있기 때문이다. 팬싸에서 팬들은 각종 코스튬을 준비한다. 동물 머리띠나 모자는 귀여운 수준이고 삿갓, 왕관, 화관 등 상반신에 걸쳐서 뭔가 색다르게 보일만한 온갖 아이템을 가져온다. 타 아이돌의 팬싸에서 핫한 아이템을 보게 되면 바로 나의 최애에게 가져간다. 팬이 건네준 아이템을 장착한 아이돌은 자신의 홈마 카메라를 향해 예쁜 표정이나 포즈를 잡고, 홈마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홈마가 담아낸 최애의 가장 귀엽고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모습은 트위터 계정을 통해 모든 덕후에게 공유된다.


팬싸에서 최애와 마주하는 불과 몇 분 몇 초의 시간을 위해 덕후가 투자하는 비용은 상상 이상이다. 인기가 많을수록 ‘팬싸 컷’(팬싸에 당첨되기 위해 구입해야 하는 앨범 수량)은 천정부지로 뛴다. 인기 남돌은 100장을 우습게 넘긴다. 더욱이 추첨제 방식을 도입하고 있기 때문에 팬싸 컷 이상 구입하더라도 당첨이 안 되는 일도 빈번하게 일어난다. 워너원 같은 경우엔 200장을 넘게 사고도 당첨이 안된 덕후가 이를 인증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금액으로 따지면 400만 원이 넘는다. 덕후의 지출 중 앨범 구매가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은 다 이런 이유에서다.




워너원과 같이 인기 있는 남돌은 어마어마한 팬싸 컷이 형성되지만 그보다 덜 알려진 아이돌 같은 경우는 도전해볼 만하다. 친구가 파던 남돌이 그랬다. 비교적 합리적인 금액으로 팬싸에 당첨된 것이다. 팬싸에 가기 위해 친구는 곧바로 다이어트에 돌입했다. 굶다시피 하며 살을 뺐고 팬싸에 입고 갈 옷과 액세서리도 새로 구입했다. 무슨 소개팅 나가냐고 놀렸더니 친구는 그저 최애가 보기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예의만 차리는 거라고 소심하게 항변했다. 알고 보니 이건 약과이고 팬싸를 위해 피부 관리, 네일 아트, 헤어 스타일링을 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고 한다. 최애에게 줄 값비싼 선물을 사가기도 한다. 흡사 소개팅 내지 데이트를 연상케 하는 이런 모습은 아이돌 팬싸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면 납득이 된다. 


팬싸는 아이돌 유사 연애의 장이다. 연예인에게 갖는 유사 연애의 감정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흔하지만 이게 단지 뇌 내 망상일 때와는 상황이 사뭇 다르다. 최애와 눈을 맞추고 손 깎지를 끼고 사랑한다는 말을 직접 듣는 게 꿈이나 상상이 아니라 실제 상황인 것이다. 이게 얼마나 짜릿하고 흥분되는 일일지는 덕후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한번 팬싸에 맛을 들인 덕후는 그다음 팬싸를 위해 또 앨범을 구입하게 된다. 그 친구 역시 그랬다. 그리고 빅톤 같은 경우 팬싸를 20번 넘게 간 팬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팬이 유튜브에 올린 몇몇 팬싸 영상을 보며 연신 감탄했다. 이 정도 되면 빅톤 멤버들은 누구나 그 팬을 알고 있고 거의 지인이나 다름없는 대화를 나누게 된다. 어떤 날은 하루에 두 번도 보기 때문에 첫 팬싸 때 나눴던 대화를 다음 팬싸 때 이어가기도 한다. 특히 자신의 최애와 티키타카 하는 모습은 썸 타는 사이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팬이 던지는 온갖 주접과 애정 공세를 적당히 밀당하며 받아치는 아이돌의 기술이 가히 일품이었다.


아이돌과의 유사 연애는 팬들 사이에서 늘 ‘뜨거운 감자’다. 특히 순덕들의 단골 멘트로 ‘유사(연애) 먹지 마세요’가 있다. 이 ‘유사무새’들은 아이돌과 유사 연애의 감정에 빠진 팬이 자칫 도에 넘는 행동을 해서 아이돌을 곤란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와중에 팬싸는 너무 대놓고 유사 연애를 판다. (유사무새의 자매품으로 ‘유출무새’가 있다. 유사가 팬을 유입하는 하나의 통로이듯, 사진 역시 아이돌의 다양한 매력을 보여줄 수 있는 방편이다. 하지만, 공식카페 회원이 아닌 사람이 공카 사진을 소비하는 게 영 못마땅한 유출무새들은 사진이 보이는 족족 댓글을 달며 같은 말을 무한 반복한다. ‘공카 사진입니다. 유출하지 마세요.’)




머글 입장에선 아마 팬싸라는 행위 자체가 매우 아스트랄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런데 이걸 일종의 롤 플레잉이라고 생각하면 전혀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그러니까 아이돌과 마주 보는 그 짧은 순간만은 마치 연인인양 서로를 대하는 것이다. 아이돌로서 활동한다면 이런 부분은 잘 알 것이고, 또 소속사에서도 아이돌에게 충분히 교육시켰을 거라고 본다. 앨범 판매량으로 이어지는 팬싸가 아이돌 수익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를 제대로 하지 않는 건 직무유기나 다름없다. 게다가 이런 감정 노동은 아이돌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은행 창구만 가봐도 그저 고객이라는 이유만으로 나에게 미소를 띠고 친절을 베푸는 직원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하물며 팬들은 아이돌에겐 존재의 근간이 된다. 하지만 어떤 아이돌은 팬들한테 은행 직원보다도 더 성의 없이 대하는 경우가 있다. 말 끝마다 어떤 감흥도 없이 '아 진짜요'로 대꾸하는 아이돌의 팬싸를 다녀온 후 탈덕한 사연은 커뮤니티에 차고 넘친다.  


말도 안 되는 생떼를 부리는 진상 고객처럼, 아이돌 팬싸에서도 과한 요구를 하거나 눈살을 찌푸릴 만한 행동을 하는 덕후도 물론 있다. 한 여돌의 팬싸에서는 몰카가 장착된 안경을 낀 파렴치한이 적발되기도 했다.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 중에는 본전을 뽑으려는 보상 심리도 작용할 거라고 본다. 이 만큼 돈을 썼고 또 언제 오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떤 기준이나 판단이 무너지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해봐도 아이돌 팬싸 비용이 너무 과한 건 사실이다. 팬싸에 가는 덕후 중 상당수가 10대인 점을 감안하면 더더욱 말도 안 되는 금액이다. 차라리 적정선에서 팬싸 1회 비용을 책정하면 좋을 텐데, 이게 앨범 판매량과 연동되는 구조이다 보니 소속사에서는 이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 같다.


팬싸에 들어가는 비용이 내가 팬싸를 가지 않는 하나의 이유이긴 하다. 하지만 결정적 이유는 따로 있다. 그것은 내가 안마받기를 좋아하지만 스파나 마사지 숍을 가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돈을 지불해서 받는 서비스 중 마사지 전문가가 해주는 안마는 나의 퍼스널 스페이스를 너무 많이 침범한다. 마찬가지로 최애를 실제 보고 싶긴 하지만 적정한 거리에서 떨어져서 응원하고 싶지 그 이상의 친밀감은 원치 않는다. 앞으로도 사회적 거리를 지키며 덕질을 할 생각이고, 언젠가 돈을 많이 벌면 성능 좋은 안마 의자를 구입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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