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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우 Dec 27. 2021

글의 농도

<우리가 보낸 가장 긴 밤> 이석원

빨리 읽고 싶었다. 도대체 어떤 책이길래?


지인이 추천해 준 이석원의 <우리가 보낸 가장 긴 밤>이라는 책을 빌리러 도서관에 갔다. 함께 간 딸의 책을 찾아주고 아이가 책을 보는 틈을타,  나도 책을 펼쳤다. 메모하고 싶은 구절이 넘쳤고,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읽으며 그간 글쓰기에 집착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와 밥을하며 압력밥솥에 뜸을 들이는 동안에도, 싱크대 옆에 서서 책을 읽었다. 아이들 과제를 봐주면서도, 짬이 나면 책을 열었다. 그렇게 책 읽기에 속도를 붙였다. 그리고 아이들이 빨리 잠들기만을 기다렸다. 나를 돌아보는 글 쓰는 시간이 너무나 간절했다.




가장 인상에 남았던 부분은 <글을 위한 글>에 '문체'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문체를 사랑한다. 문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선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도 있고,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도 여러 가지일 테지만 내가 말하는 것은 그중에서도 톤, 즉 스타일, 혹은 무드, 쉽게 말하면 필치 정도가 되겠다. 그 작가만이 낼 수 있는 글의 색깔, 분위기, 고유의 스타일 뭐 이런 것들. 어떤 이의 글을 읽으면 어, 이건 누구누구의 글이어야 하고 대번에 알아볼 수 있게 만드는 그 작가만의 벗어버릴 수 없는 인장 같은 것, 내겐 그게 어떻게 보면 내용이나 본질보다 더 중요하다. pp.238-239


나는 문체가 있을까? 그간 썼던 글을 신세한탄이나 일상 성찰에 대한 기록들, 일기 같은 글이었다. 이것을 독자와 공감대를 형성하는 열린 글을 쓰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깊었다.



그리고 내 글의 색깔, 분위기는 어떤가?

내 글은 '검고', '쓸쓸하고', '서글픈' 그런 느낌이 든다. 나는 살포시 입가에 미소를 풍기는 글을 읽을 때면 샘이 나기도 했다. 그런 글은 쓰려해도 쓸 수 없었다. 왜였을까?



<보통의 존재>도 책 전체에 엷은 우울감 같은 것이 배어 있다. 쓰면서 중요했던 건 그 농도였다. 조금만 진하거나 옅었어도 아마 지금과 같은 모습을 띠기 어려웠을 것이다. (중략) 팔레트에 이런저런 색의 물감을 짜 놓고선 이것을 조금 더 넣어보기도 하고, 저것을 좀 빼기도 하면서, 만약, 지금 이 글을 읽으면서 무언가 이 글만의 어떤 감정이나 분위기 같은 것이 느껴졌다면 나는 채색에 성공한 것이다. p.240


사회 초년생이던 시절 첫 직장 사수가 내게 했던 말이 있다.


"너가 사는 세상에는 흑과 백만 있는 것 같아. 동전은 앞면과 뒷면만 있지만, 삶은 그렇지 않아. 다른 색도 있음을 생각해 봐."




내게는 세상을 보는 눈이 흑과 백이 전부였던 시절이 있었다. 다른 색을 낸다는 것 자체가 어려웠고, 좁은 시야에 갇혀 있었다. 살아온 삶이 농도가 너무나 짖었기에.


삶의 위태로움을 감수하면서 시야를 넓히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생전 책 한 권 읽지 않던 내가 도서관에서 살았고, 아무 취미생활이 없었던 내가, 검도를 배운다든지, 사진, 독서 등 여러 동호회에 참석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나를 세상과 섞는 데는 용기가 필요했고, 나의 색을 찾기 위해 청춘을 썼다. 어느덧 시간이 지나면서 사진기만 딸랑 들고 훌쩍 떠나는 혼자만의 여행도 즐길 수 있었다.


그런데 흰색에 다른 색을 섞는 것은 쉬웠지만, 검은색에 다른 색을 섞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냥 검은색이었다. 그래서일까? 외면은 다양한 색을 지닌 듯 보이지만, 내면은 여전히 어두운 색을 갖고 있었다.



1년간 유년 시절에 상처를 파헤치는 글을 쓰면서, 내게 난 상처를 마주하는 시간을 가졌다. 상처는 여전히 아팠고 상습적으로 나를 자책했다.



상처는 못나서 받는 게 아니라
더 좋아하기 때문에 받는 거야.
그러니 자책은 필요 없어.
p.316


이석원의 우리가 보낸 가장 긴 밤에서 '상처는 더 좋아하기 때문에' 받는 거야 하는 글을 보고 위안이 되었다. 나는 정이 많았구나, 나보다 타인을 위한 삶을 그간 살았구나 이제는 나를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우물 안에 가득 고여 있는 물은 여전히 다. 글을 쓰며 끄집어내고, 다시 깨끗한 물이 채워진다면 나도 언젠가는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는 글을 쓰게 될 날이 있겠지.






사수는 최근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너가 가장 잘하는 건, 의심 없이 자신을 믿는 거야!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을 너에게 맡겨도, 그것을 끝까지 해내더라고! 그 힘으로 앞으로도 문제없을 거야!"




어느 날, 우연히 티브이에서 본 이영자 씨의 한마디. "과거의 이영자한테 오늘의 이영자가 야단치고 싶다. 그렇게 업신여겼어 내가 나를. 이렇게 가치 있는 애였는데." p.346



다양한 관점의 시선이 열리면, 농도를 조절할 줄 아는 삶을 살 수 있겠지? 그렇게 살다 보면 짙음과 옅음 내고 진함과 묽음 조절하는 나만의 글을 쓰게 되겠지.


나는 내일도, 모레도 계속해서 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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