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을 깨워줄 영화 속 명장면 2

"하나를 살리려 백을 희생할까“

by 민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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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언 일병 수색 작전에 투입된 밀러 대위의 특공대


처참했던 제 2차 세계 대전 노르망디 상륙 작전 후, 사망자의 가족들에게 부고를 보내던 군은 한 형제들이 같은 시기에 모두 전사했음을 알게 된다. 네 형제 중 세 명이 전사하고 남은 한 명은 공수부대로 잘못된 곳에 낙하해 생사도 불투명한 상황.


세 아들의 전사통보를 하루아침에 받게 될 라이언 일병의 어머니를 위해 군은 마지막 남은 막내아들인 라이언 일병을 구출하기로 결심하고, 특수임무를 수행 중이던 밀러 대위의 특공대팀을 '라이언 일병 구출작전'에 투입한다.


내키지는 않지만 전쟁이 한창인 와중에 사령부에서 곧장 떨어진 명령을 회피할 수는 없다. 이미 상륙 작전 중 대원을 절반 가량 잃었건만, 적진 한복판에 떨어져 생사를 알 수 없는 병사 한 명을 구출하기 위해 밀러 대위 팀은 다시 전장으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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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번 : “대위님, 질문 있습니다. 왜 8명이 1명을 구하러 가야하는 거죠?”

밀러 : “누구 답을 아는 사람?”


임무를 받고 길을 떠나던 밀러 대위는 중화기 사수 레이번의 질문을 받는다. 농담처럼 던지는 말이지만 이는 영화 속의 인물들에게나 관객들에게나 모두 던지는 질문이다. 사지나 다름없는 적진 한가운데 고립된, 살아있는지도 모르는 불확실한 목표를 위해 확실한 8명의 목숨을 거는 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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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드 : “그놈 엄마를 생각해봐”

레이번 : “나도 엄마 있어, 여기 엄마 없는 사람 있어? 대위님도 엄마가 계실걸?"


자식 네 명의 전사통보를 받게 될 라이언 일병의 어머니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겠지만, 사실 레이번의 말도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한 사람의 고통이 더 클 것이라고 해서, 다른 사람의 고통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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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번 : “(중략)대위님이 저라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밀러 : (중략)“이건 정말 멋지고 가치 있는 일입니다. 최선을 다해 충실히 임하겠습니다. 더욱이 라이언 어머니께 위안을 드릴 수 있으니 기꺼이 나와 내 동료의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특히 네 목숨 말야 레이번.”


사실 밀러 대위라고 부하들을 사지로 내모는 것이 좋을 리가 없다. 하지만 두 가지 이유에서 그는 이 사태를 받아들이려고 한다.


먼저 사회적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다. 이따금 터지는 병역 비리나 부동산 스캔들 같이, 공적 이익에 배반하는 일에 대중들이 극심한 분노를 쏟아내는데는 이유가 있다. 인간 사회는 전문화된 분업으로 막대한 부와 이익을 창출하는 하나의 시스템이다. 그 시스템을 유지하는데는 서로의 이익을 보존하기 위한 공동의 책임이 요구된다.


당연히 누구 하나라도 이 책임을 외면할 경우 책임은 타자에게 전가된다. 그간 사회가 확장되고 정교화 되면서 이 책임은 자본과 수많은 권력으로 분산되어 모호해졌지만, 결국 모든 사람이 책임의 대가를 지는 건 같다. 이는 존 로크가 "사회계약론"에서 자유로운 인간이 국가에 소속되는 이유로 그 혜택을 묵시적으로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같은 이치로 경제학에서 '보이지 않는 손'을 외친 애덤 스미스 역시 이에 대해서 '사회는 정교한 의지에 의해 돌아가는 시계 태엽'과 같다면서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엇이 다른 사람들의 큰 이익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도록 촉구하는가? (중략) 이 경우 작용하는 것은 더욱 강렬한 강제력 있는 동기이다. 그것은 이성, 천성, 양심, 가슴속의 동거인, 내부의 인간, 우리 행위의 재판관 및 조정자이다. (중략) 대중 속의 한 사람에 불과한 우리가 그처럼 수치심을 모르고 맹목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우선한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분노와 혐오, 저주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이 바로 이 사람이다.

애덤 스미스, 『도덕 감정론』 중


두 번째는 <스워드피시> 편에서 말했던 공리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다. 다수를 위해 하나의 희생이 정당화 된다면,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개인주의에 함몰되고 만다. 공적인 이익에 부합하는 일이 아니면 나서지 않으며, 또 어떤 행동을 취했을 때 돌아오는 것에 대한 막연한 기대심리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의 관심은 공공의 이익이라는 테두리 안에 들어가는데만 집중된다. 소수로 버려지지 않기 위해 경쟁까지 할 뿐, 어떠한 이타심이나 배려를 기대할 수 없다. 하물며 전쟁처럼 사람의 목숨을 숫자로 셈하는 곳에서 더 말해봐야 무엇하겠는가.


그러나 밀러 대위의 일화가 전장에서 고군분투하는 병사들과 그의 가족들에게 전달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자신이 홀로 고립되었어도, 혹은 자신의 가족들이 사지에 내몰렸어도, 구원받을 길이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믿음'이 잔혹한 인류사 속에서도 인류를 유지한 힘이다. 이타적인 사람들에 의한 ‘최악의 상황을 오지 않을 것’이란 믿음은 그 자체로 힘겨운 삶을 이겨내게 만든다. 비록 세 아들을 잃었지만 막내아들이나마 살아 돌아온다면, 라이언의 어머니는 삶을 이어갈 최소한의 이유쯤은 남겨둘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살아가면서 무엇인가 잃어버린 사람들 모두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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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어떤 곳을 넘어온 것 같아. (중략) 잘 모르겠어. 자네 생각은 어때?"
"잘 아시잖습니까. (중략) 라이언 그 친구 말이 맞습니다. 왜 그 녀석만 자격이 있죠? 그가 남겠다면 우린 떠나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우리도 여기 남았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남는다면, 나중에 이 지독한 혼란 속에서 라이언 일병을 구한 게 제일 잘한 일이었다고 회상하겠죠."

<라이언 일병 구하기>, 밀러 대위와 호바스 상사의 대화 중


설령 의무라는 거창한 말이 아니더라도 좋다. 우리는 늘 미래를 살아가므로 어떤 선택에 대한 결과를 책임지게 되고 내 존재의 근거로 삼게 된다. 만일 어떤 곤경에 처한 사람을 구하는 일이 완벽히 불가능은 아닐때, 이 사람을 버리고 간다면 단지 그 사람만을 죽인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을 구할 수 있었던 기회까지 죽이는 셈이 된다. 여기서 버려진 기회는 살아남은 자에게 다양한 형태의 짐이 되어 돌아온다. 그게 가족의 원망이든, 심리적인 부채가 되었든 말이다.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과 시도해 본 것의 차이처럼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진 전쟁터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죽음을 보고도 도망치지 않은 까닭에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타자의 가치를 귀중히 여기는 사람만이 나 자신의 가치도 높게 평가받는 법이고, 또한 스스로도 그렇게 여길 수 있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는 누군가를 돕는 일이 오히려 나 자신을 돕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더구나 밀러 대위는 영화 속에서 고백했듯이 잔혹한 전장에서 사람을 죽이는 일에 환멸을 느끼고 만다. 처음에는 정의감에, 나중에는 분노와 복수심에 적을 죽이다가도 결국 전쟁이 길어지면 남은 것은 야차처럼 사람을 해치며 피를 뒤집어쓴 자신의 모습 뿐이다. 무엇을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지 조차 잊어버리기 좋은 전쟁터에서 사람을 죽이는게 아닌 구출하라는 명령은 오히려 대위에게 위안처럼 다가오지 않았을까?


결국 어떤 경우에서든 선택은 모두 자유지만, 밀러 대위의 팀은 후회를 남기는 쪽은 아닌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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