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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경민 Nov 16. 2024

인생의 내리막에 접어든 남자

#1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의 주인공 릭 달튼은 '바운티 로'라는 인기 프로그램에서 정의의 사도 역할로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 할리우드에서 남부러울 것 없는 대스타의 길을 걷고 있었던 그는, 다양한 작품과 TV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내리막이라는 단어를 잊어버린 사람처럼 살았지만 어느 날부터 주인공 배역에서 슬금슬금 밀려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몇 년째 단역을 전전하게 된 릭. 어렵게 약속을 잡은 제작자와 자신의 커리어에 대한 유쾌한 이야기를 나누지만 한창 릭의 이야기를 재밌게 듣던 마빈은, 문득 그가 지금 맡는 배역과 릭의 상태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는데.


"그 작품들에서 늘 악역인가?"

"네."

"(중략) 싸움에서는 지고?"

"네, 당연하죠. 악역인데"

"하여간 방송국 놈들 하는 짓거리는 여전하구먼"

"'빙고 마틴'을 예로 들어보자고. 스콧 브라운이란 신인을 기용했으면 방송국에서도 키워주고 싶겠지?"

"그땐 종영한 프로의 주연을 악역으로 부르고 주인공이 악역을 때려눕히는 씬을 찍어."

"하지만 시청자들 눈엔 '빙고 마틴'이 '제이크 케이힐'을 줘 패는 걸로 보이지. 알겠나?"


예컨대 <어벤저스>의 캡틴 아메리카가 새로운 히어로 물에서 악역으로 등장한다면 어떨까. 실제로 캡틴 아메리카 역의 크리스 에반스는 최근에 넷플릭스 영화 <그레이 맨>(2022)에서 악역을 맡기도 했지만, '캡틴 아메리카'라는 이미지가 더 강하게 각인된 우리에게는 <그레이 맨>에서 크리스 에반스가 어떤 역할을 맡았던지 간에 '캡틴 아메리카'가 주인공인 라이언 고슬링에게 얻어맞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같은 이치로 복싱 세계에서는 이전 챔피언을 떠오르는 신예가 잡는 그림을 의도적으로 그리기도 하고, 토너먼트 형식으로 상대와 겨뤄야 하는 다른 스포츠에서도 신성을 띄우기 위해 기존 챔피언을 희생양으로 삼는 그림을 그릴 때가 종종 있다. 


완전히 새로운 경기, 새로운 연기가 펼쳐진다고 해도 한 인물이 가지고 있는 연속성은 대중들의 뇌리에서 쉽게 변하지 않는다.


"다음 주엔 론 일라이가, 그다음 주엔....... 밥 콘라드가 쫄바지 입고 자넬 두들겨 패지. 앞으로 2, 3년 샌드백 연기하면서 풋풋한 놈들한테 얻어맞다 보면 자네 이미지는 대중들에게 심리적으로 각인 돼버리는 거야."


이미지가 곧 자신의 커리어이자 밥줄이나 다름없는 배우들의 세계에서, 자기가 신예 띄우기용 샌드백 신세가 될 것이라는 말에 릭은 비로소 자신이 처한 상황이 자기 생각보다 더 심각한 지경에 놓여있음을 깨닫게 된다.


"자, 그럼 릭. 다음 주엔 어떤 놈에게 처맞을 건가?"


아무것도 가진 적이 없는 빈털터리가 허세를 부리려고 무리하게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가 뒷감당을 못해 원래 생활로 돌아가는 것과, 최고의 위치에서 많은 것들을 누리고 있었던 사람이 급격하게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의 충격은 분명히 다르다.


릭은 자신의 배우 생활을 완성하고 있었던 주인공 배역, 혹은 정의롭고 호쾌했던 영화 속 이미지를 더 이상 연기하지 못할뿐더러 오히려 그 반대로 자신을 돌려세워야 한다는 점에 큰 충격에 빠진다.


돈이나 명예를 모두 떠나,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 자체가 흔들리고 마는 것이다.


#3

"뭐 읽으세요?"

"(중략) 야생말 조련사 이야기야. (중략) 이지 브리지는 20대 때 젊고 미남이었고 다루지 못하는 말이 없었지. 왕년엔 대단했어. 근데 이제 30대 후반이고 심하게 낙마해서 허리가 망가졌어. 장애인이 된 건 아니지만 척추에 문제가 생겨서 고통 속에 살게 됐지.


결국 다시 촬영장으로 돌아와 악역을 맡게 된 릭은, 배역의 옷매무새도 자기 뜻대로 하지 못하고 평소 그토록 혐오하는 히피 스타일로 스스로를 치장하게 된다. 더군다나 제 앞가림도 못하는 판국에 오랫동안 함께했던 스턴트맨이자 절친한 동료 클리프의 일자리까지 봐줄 수 없는 지경이 되자 그는 더더욱 삶에 환멸을 느낀다.


"얼마나 읽었어요?"

"반쯤."


촬영장에 출근을 해도 장돌뱅이 보듯 누구 하나 대접해 주는 사람도 없고, 세트장 한 구석에 언제 쓰일지 모를 촬영 기구와 함께 덩그러니 던져진 릭은 이제 막 8살이 되었다는 아역 배우 옆에 걸터앉아 책을 읽는다.


"지금 이지 브리지는 어떤 상태예요?"

"그 친구는....... 이젠 최고가 아니야. 최고와 거리가 멀지. 그리고 이제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어. 쓸모가......."


소설의 줄거리를 알려달라는 아이의 말에 줄거리를 읊던 릭은 주인공의 삶을 나지막이 정리해 주면서 꼭 그 이야기가 자기 얘기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소설의 반쯤 읽었다는 그의 인생도 반쯤 지나온 셈이고, 소설 속 주인공도 릭이 읽고 있는 시점에는 더할 나위 없는 최악의 상태.


"매일 조금씩 쓸모없어진다는 걸......."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린 릭은 똑 부러진 8살 아이 트루디에게 위로를 받지만 이미 그는 어떤 위로도 와닿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정작 릭에게 닥친 문제는 당장의 위로를 받지 못할 만큼 슬픔에 빠져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을 넘어 그의 생각이 현실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느냐의 문제였다.


촬영이 시작되고 나서도 릭은 맡은 배역조차 제대로 해내질 못하고 감독의 불만을 듣거나 대사를 까먹는 치명적인 실수까지 저지르고 만다. 상대역인 신예 짐 스테이시가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연기를 하고 있는데 반해 자꾸만 대사를 까먹는 자신을 보며 그는 조바심에 빠져 실수를 반복하는 악순환에 빠진다.


원하는 배역이 아닐지언정 연기 실력이나 배우로서의 기본 소양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데도, 스스로를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가고 있다고 여긴 그는 본래 가지고 있는 실력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2

"(중략) 배우의 본분은....... 연기의 방해물을 피하고 100%를 끌어내려고 노력하는 거예요. 사실상 불가능하지만 추구하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거예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릭 달튼은 그 자신이 스스로를 형편없는 내리막에 접어들었다고 평가하는 바람에 8살 꼬마의 뼈 있는 조언을 귀담아듣게 된다. 잘 나가는 대스타였다면 거들먹거리며 '꼬마야 네가 뭘 알겠니'라며 무시했을 법한 상황도 '내가 누군가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자격이 없다'며 자신을 한없이 낮춘 결과 비로소 들으려고 하지 않았던 타인의 조언이나 충고를 마음속에 들이게 된 것이다.


상승가도만 달리던 사람이 실패를 겪지 않고 갑자기 고꾸라졌을 때, 망가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받아들이지 않고서 현실부정에 빠지는 경우에 비한다면 릭 달튼은 운이 좋다고까지 해야 할까. 영화 <바빌론>(2022)의 주인공 넬리가 타락의 과정에서 그 자신이 어떤 모습인지 스스로 지각도 하지 못했던 것에 비하면 말이다. 같은 내리막 길이라고 해도, 자신이 내리막을 걷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더 빠르게 올라갈 궁리도 하고 올라갈 계단도 빠르게 찾는 법이다.


여하튼 릭은 트루디에게서 배우로서의 본분을 다시 되새기게 되는데, 트루디의 조언은 최고가 되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최상의 어떤 경지를 얻게 된다는 보편적인 조언이면서도 릭에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릭은 '정의로운 카우보이'를 잘 연기하는데만 골몰했지 그 연기 능력을 다른 배역에 적용시켜 볼 생각은 여태껏 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잘하는 걸 해야 하는데 왜 이걸 하는 거야' 같은 생각에 사로잡혀 할 수 있는 것도 뒷전으로 밀어둔 채 암울한 사태를 보지 않으려고 두 눈을 가리는데만 집중했을 뿐이다.


"전 촬영장에서는 배역명만 써요. 그래야 스토리의 리얼리티에 몰입하기 좋아요. 본명도 써봤는데, 배역명을 쓸 때가 살짝 나았어요."

"살짝이라도 낫다면 그쪽을 선택할래요."


대스타의 삶을 살면서 릭은 자신의 인생을 화려하게 빛내줄 수 있는 역할에 목을 맸지만 트루디의 조언을 들으면서 자신이 어떤 배역이든 화려하게 빛내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닫는다. 알록달록한 전등갓으로 빛을 꾸미는 사람이 아니라, 그 스스로 다양한 빛을 내며 주변의 형태를 가지각색으로 비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릭뿐만 아니라 인생을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인생의 주인공처럼 보이는 화려함이 없어도 어디에서나 빛날 수 있다는 게 더 중요한 게 아닐까. 자리가 있어야 빛날 수 있는 사람은 자리만을 찾게 되지만, 자리가 없어도 빛나는 사람은 어떤 일이든 해낼 수 있다.


맡은 배역에 최대한 근접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다면 기꺼이 그러겠노라고 선언하는 트루디 앞에서, 릭은 '악역'이란 실패자들이 떠밀려서 안게 되는 샌드백 역할이 아니라 그 스스로 새롭게 개척해야 할 연기의 한 장이 되리라 여기게 된다.


하기 싫으니 대충 끝내고 주연급에 어울리는 정의로운 캐릭터나 찾아 나서겠다던 과거의 태도와 달리 릭 달튼은 새로운 자신의 역할을 받아들인 순간부터 악역에 관한 한 최고가 되고자 다짐한다. '악역의 정상'을 다짐한 순간 릭에게 더 이상 이 역할은 건성으로 넘어갈 하찮은 일이 아니다. 그는 악역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게 다시 프로로서 화도 내기 시작하고, 감독이 요구한 디렉팅을 연구하며 캐릭터를 창조하는 지경에 다시 올라간다.


#4


나중에 다시 진행된 촬영에서 감독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애드리브에 기막힌 아이디어로 단 한 번에 컷을 끝낸 릭 달튼에게 트루디는 '최고의 연기'였다며 속삭인다. 릭은 이 한 번의 결심으로 자신의 연기 저변을 넓혔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어떤 배역이 주어져도 최고의 결과물을 뽑아낼 수 있다는, 진정한 의미의 대배우로 거듭나게 된다.


그 일이 있은 뒤로 그는 그토록 싫어하던 이탈리아 영화에도 출연하고 온갖 종류의 캐릭터를 소화하게 되지만, 결국 그게 장점으로 꼽힌 덕분에 독특한 캐릭터를 구상 중인 감독들의 눈에도 띄게 되어 과거의 명성을 조금씩 회복해 나간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서 보는 릭의 이야기는 '최선을 다하라'는 말의 또 다른 의미를 찾게 해준다. 최고의 프로는 잘 짜인 배역에서 화려한 피날레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특별함을 어디에 끼워 넣든지 멋진 마무리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 대스타가 되고 나서도 연극 무대에 오르는 영화배우들, 혹은 전 세계적인 흥행 작품의 영웅으로 살다가도 훨씬 더 보상이 좋지 않고 주목받지 못하는 정극 영화에 출연하려는 배우들의 생각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인생에서 중요한 건 우리가 맡을 배역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연기로 배역을 소화하느냐에 더 방점이 찍혀 있을 것이다. 나만이 살고 있는 이 인생에서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최고가 된다면, '살짝이라도 나은 것'을 추구하며 산다면 그것만으로도 값지고 멋진 인생으로 나아갈 방법이 아니겠는가.









*본문의 장면 순서는 실제 영화와 다르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실제 영화의 장면 순서는 본문에 표시된 씬넘버 1-2-3-4 순입니다.


*본문 사진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2019)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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