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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sembler Jun 04. 2020

나의 살던 고향은

40살 한옥 이야기

Q. 고향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소나 물건은 무엇인가요?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어렸을 때, 그러니까 대구를 떠나기 전 중학생 그때까지는,

나도 '저런' 고향을 갖고 싶었다.

매연 가득한 도시가 아닌, '고향의 봄' 냄새를 가득 담은-

거칠고 날카롭고 차가운 기억이 아닌, 푸근한 시골의 따뜻함을 담은-

그런 고향을 갖고 싶었다.


하지만 대구를 떠난 지 벌써 12년이 된 지금,

이제 대구는 나에게 저만치의 정겨움을 담은 '고향'이 되었다.



고향 (故鄕)

[명사]

1.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곳.

2.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

3.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



대구를 생각해도, 어린 시절을 떠올려도, 고향이란 단어를 들어도,

동일하게 떠오르는 하나는- 나의 어린 시절을 보낸, 40살 된 한옥이었다.


재개발을 운운하던 대구의 낡은 동네,

좁은 골목길에 나지막이 들어선 붉은 벽돌의 주택들 사이에

더 나지막이 서있는 회색 담벼락 안, 도시한옥.




아빠의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가게 문을 닫은 아빠와 딸린 식구들은 할머니 집으로 들어갔다.

그때가 내 나이 8살, 막 초등학교를 입학했던 때였다.

그렇게 나는 전학을 갔고, 인생 처음으로 동네 친구들과 이별을 했다.


아빠의 보일러 가게와 연결된 작은 방이었지만, 그래도 우리만의 공간이었던 곳.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엄마 아빠와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곳.

그런 곳을 떠나 낯선 동네의 한옥으로 갔다. 심지어 화장실이 바깥에 있는.


그 한옥은, 이라크에서 일하며 돈을 벌어온 아빠가 할머니 할아버지께 사드린 집이라 했다.

집을 사주었던 아들이, 사업에 실패하고 그 집으로 들어왔을 때 부모의 마음은 어땠을까-.


겨우 8살이었음에도, 엄마 아빠와 이 상황이 그다지 떳떳하진 못함을 느꼈고,

그래서 나는 그날부터 애늙은이로 자랐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한옥의 대문은 주황색과 노란색의 그 사이, 황토빛의 나무문이었고,

열쇠가 따로 필요 없이 연결된 낡은 노끈을 당기면 대문을 열 수 있었다.

대문이 열리면 왼쪽으로는 철문 달린 수세식 화장실 하나,

(그 화장실은 끈을 당겨야 물이 내려갔고, 늘 그 물방울이 위에서 나에게 튀곤 했다.)

화장실 문 바로 앞으로는 사람 한 발자국 디딜 만큼 떨어지고서

옥상으로 올라가는 좁은 계단이 서 있었다.

대문의 오른쪽으로는 아주 완만한 내리막길이 있었고,

그 내리막길을 내려가면 정면으로 평상이 보이고 ㄱ자 구조의 집이 나왔다.


부엌, 큰 방, 작은 방, 마루까지가 한 묶음.

그 옆으로는 신발을 신고 넘어가야 하는 기타 치는 막내 삼촌 방 하나.

그리고 그 옆으로는 신발을 신고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야 하는 큰아빠 방 하나.

(그 동굴 같던 큰아빠 방은 무서워서 거의 가지 않았지만,

아주 가-끔 할머니의 재봉틀 하는 모습을 구경하러 따라갔었다.)

막내 삼촌의 방 맞은편으로는 할머니가 엄마 아빠에게 내어준 방이 하나 있었다.


엄마 아빠의 첫 신혼방이었다고 했다.

그 방은 보일러가 들어오지 않아, 엄마 아빠가 모두 일하러 가서 늦게 들어올 때면

오빠와 나는 엄마 아빠의 '두껍고 무거운' 혼수이불을 덮고서 몸을 녹였다.

냉냉한 공기가 가득해 오들오들 떨어야했던 방이었지만, 우리에겐 최고의 아지트였다.

우리만의 공간에 익숙했기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텔레비전을 보시는 안방은 불편했다.


그렇게 그곳에서 5년, 많은 일들이 있었던 나의 유년시절이 흘러갔다.




20대가 되기 전에는, 8살 이후로 내 인생이 망가졌다며 오랜 기간 원망했었다.

가난이나 슬픔 따위 전혀 모르고 살았던(어쩌면 모르는 게 당연했을) 8년의 삶 이후로,

내 10대의 초중반은 너무 힘들었고, 또 힘들었고, 그리고 힘들었기 때문에.

그 기억들이 소중한 추억이 되기까지는- 정말 많은 시간과 변화가 필요했다.

그리고서 지금, 어렵게 얻은 추억인만큼(힘든 시간 끝에 추억이 된 만큼),

지금은 그곳이 많이 그립다.


나를 키우고, 울리고, 달래서 여기까지 오게 한 힘.

누군가보다는 더, 그리고 누군가보다는 덜 힘들었겠지만-

어찌 되었든 나라는 사람을 만들어낸 곳. 우리 집.


재개발로 빽빽이 세워진 아파트에 무너져 폐가가 되었고,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몇 장 없는 사진과 기억에 매달릴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아직까지 내 기억 속 선명히 남아있는 그곳.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감히 가고 싶다고 말할지도 모를 곳.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던 대구.

낡은 한옥, 빛바랜 추억, 그리고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울고 웃고 꿈꾸던 소박한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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