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를 위해 사용하고 있는 주간 플래너를 들춰봤다. 첫 주는 텅 비어있다. 우울과 무기력에 잠식되었다는 증거다. 그나마 둘째 주는 빼놓지 않고 무언가를 적었지만, 일다운 일은 외주 포스팅뿐이었다. 결국 그 주 일요일, 다시 공유오피스 계약을 했다. 잠옷차림으로 책상에 앉을 수 있는 집에선 더 이상 작업 효율을 기대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하지만 오피스로 향하면서도 큰 기대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재취업용 포트폴리오만이라도 완성하자는 심정으로 결제를 했으니까. 내 몸에서 의욕과 열의가 많이 빠져나간 상태였다. 디자인도, 글쓰기도, 포스팅도 다 내려놓고 어딘가 훌쩍 떠나고 싶었으니까.
다행히 먹구름 같던 감정은 3주 차가 되면서 서서히 옅어졌다. 마침 동생도 개발 공부때문에 계약했던 곳이라 거의 매일 함께 어울렸다. 같이 출근하고 같이 밥먹고. 고요한 호수 같은 성격을 지닌 동생과 함께 다니면 뾰족하게 날이 선 내 마음도 어느새 잠잠해진다. 덕분에 3주 차부터 5주 차까지는 하루를 계획하고, 지연하고 또 달성하며 지냈다. 하루의 할 일을 기록하고 체크 표시한 그 주의 페이지들을 바라보면 새삼 내 진심을 깨닫는다. '맞아, 나 이렇게 살고 싶었지'
프리워커 실험을 (여기에 조용히) 선언하고 10개월을 보내면서 작업 공간의 중요성만큼이나 그곳에서 누구와 함께 지내느냐도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홀로 계약한 공유오피스에선 억지로 끌어올린 의욕의 유효기간이 3개월이 채 되지 않았는데 반해 동생과 함께일 땐 힘주어 의지를 발휘할 필요가 없었다. 조금 더 부드러운 마음으로 책상에 앉을 수 있었달까. 부정적 감정에 취약한 지금의 나에겐 편하게 어울릴 수 있는 한 사람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런데 이 정도 쿵작이 잘 맞는 동생이라면 협업을 해야 하지 않을까?
+ 집 가다가 배고파서 먹었던 편의점 라+맥.
퇴사한 회사에서 심장 떨며 작업했던 디자인 하나가 있었다. 내가 바들바들 떨며 작업을 했던 이유는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처음으로 식품회사의 20페이지 회사소개서를 홀로 디자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실무 경험이 충분하지도 않은데 혹시나 실수를 할까 봐, 또는 클라이언트가 내 디자인 작업물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까 봐 작업하는 내내 걱정이 풍선처럼 부풀었던 기억이 난다. 다행히 친절하고 사려 깊은 고객 덕분에 호의적인 피드백을 받으며 작업을 마무리하긴 했는데, 문제는 지금 와서 그 브로슈어를 보면 민망해 죽겠다는 것이다.
폰트며, 색감이며, 레이아웃이며 사진의 배치며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었다. 이 결과물을 컨펌해 준 고객에게 송구할 정도로.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해당 브로슈어를 리디자인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준비하고 있는 포트폴리오의 내용도 빈약하다고 느끼던 차였고, 1년 전의 나와 현재의 내 수준을 냉정히 비교해보고도 싶었다. 그렇게 하루 한 두장씩 페이지를 꾸며갔다.
마치고나니 깨닫는다. 결론적으로 이 작업은 내게 꼭 필요했다는 것을. 과거의 디자인보다는 깔끔한(?) 결과물이 된 것 같다는 약간의 만족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나 자신에 대해 다시금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은둔내향인인 나는 역시 홀로 몰입하는 환경에서 작업할 때 가장 에너지가 차오르고, 직접 만든 아웃풋이 눈에 보일 때 나의 쓸모를 발견한다. 무엇보다 오늘 할 일을 마치고 내일 해야 할 작업, 다음의 할 과정들이 머릿속에서 자연스레 그려지는 순간이 좋다. 그 과정이 나에겐 희망적이기까지 하다. 내일을 기대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니까. 결국, 작업이 일상에 활력을 준 셈.
물론 작업 결과물에 대해서는 냉정한 평가를 받을 것이다. 내 디자인이 누군가에게 선택되기 위해선 겪어야만 하는 과정이겠지. 그래도 아마추어의 세계에서 외롭게 달리고 있는 지금 단계에서는 작업의 기쁨만큼은 온전히 누려보고 싶다. (언제 사라질지 모르니까)
디자인 포트폴리오를 95% 정도 완성했다. 이 문장을 쓰고 나서 마음이 조금 쓰리다. 포트폴리오를 완성했다고 브런치 10월 회고에 적어두려고 글쓰기를 하루하루 미뤘는데 이러다간 11월 중반에 회고글을 쓸 것 같아 부랴 부랴 브런치를 켰다. 사실, 이 95%도 너무 오래 걸렸다. 보통의 디자이너들은 퇴사 후 이직을 위한 포트폴리오 작업을 최우선 과제로 두고 신경을 쓸 텐데, 나는 청개구리 심보로 계속해서 미뤘다.
핑계를 대자면, 올해 초는 쓰다 만 직무 전환 이야기를 얼른 마무리하고 싶었고, 내가 알고 있는 정보와 경험을 담은 티스토리 블로그도 제대로 운영하고 싶었다. 즉, 생업 기술로 배운 디자인보다는 경험을 정리할 수 있는 글쓰기에 더 신경을 쓰고 싶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초반에 몰두했던 브런치 매거진과 티스토리 두 채널 모두 진척률이 좋지 않았다. 여름엔 본가에 큰 이슈가 있기도 했고 몸이 버텨주지 않은 탓도 있지만.....다 핑계겠지....
내 미진한 실행력을 깨닫고 최후의 수단이라는 생각으로 포트폴리오를 매만졌다. 숨고 등록을 위해 디자인 작업물에 목업(디자인을 실제처럼 보이게 가상으로 입혀보는 과정)은 해놔서 금방 하겠지 했는데, 거의 한 달은 걸렸던 것 같다. 특히 앞부분에 들어가는 표지와 내 소개 부분을 어떤 콘셉트로 표현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아 끙끙 앓았다. 고심해 한 가지를 생각했고 내용은 채웠지만, 1차로 작업한 디자인이 썩 내키지 않아 그 부분만 여전히 미완의 상태다.
나머지 디자인 작업물에 대한 소개는 정리를 마쳤지만, 사실 이대로 마침표를 찍어도 되나 의심스럽다. 포트폴리오를 만들며 살펴본 비핸스의 공개 포트폴리오가 아른거려서다. 전 세계 디자이너들이 모여있는 그곳의 작업물들 살펴보다 보면 어깨가 절로 쳐진다. 인쇄 디자인은 물론이고 웹디자인과 브랜딩 한 이력까지 빼곡히 채운 그들의 포폴은 번쩍번쩍 광채가 나니까.
하지만 계속 입 벌리고 감탄만 한다고 나의 포폴에 진전이 있는 것은 아니니 그냥 인정하기로 했다. 다른 건 몰라도 어도비 프로그램 앞에서 보낸 시간만큼은 나보다 그들이 훨씬 길 것이라는 걸. 헤아릴 수도 없는 그 시간을 상상하다 보면 시기나 부러움이 무색해진다.
결국, 할 수 있는 만큼의 보폭으로만 걷기로 했고 다행히 (내 기준) 95%라는 숫자는 거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