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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쌀씨 Oct 24. 2018

4. 가장의 마음

세월에 흐려지기 전에 뱉어보는 나의 속내

그 뒤로 나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리고 의연해졌다. 나는 이 집안에 이러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이 나뿐이라는 자부심을 갖기로 결심했다. 가족이지만 가족이라고 생각하기엔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여겼던 사람들. 그들의 고인물에 나라는 존재는 가장 냉정하고 빠르게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이 사람들은 할머니와 관계된 문제에서 냉정한 판단을 입으로 뱉어내지 못했다. 그것은 그들이 가족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못나고 아무리 싫어도 가족으로 보낸 시간이 있는 이상 그들은-타인인 내 시선에서- 일을 진행하는 속도가 느렸다. 각자의 먹고사는 일은 다 핑계다. 그냥 심정적인 게으름인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아직 그들과 같은 정을 갖추지 않은 나는 아주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시각으로 나의 시할머니- 그녀를 바라보게 되었다. 나는 할머니가 대한민국에서 받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복지를 알아보았고 그것을 실행했으며, 암 수술 성공 후 결국 일주일 만에 압박골절로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생활을 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순간까지 남편을 도왔다.

이제 대학병원에서 받을 수 있는 치료가 없으며 더 이상의 간병인 비용은 무의미하다는 사실 또한 내 판단으로 결정했다. 나는 아침 일찍 아들을 친정엄마에게 맡기고 수간호사에게 들은 오전 회진 시간에 맞추어 병원에 뛰어갔다. 수족들을 거느리며 병동을 떠나는 의사를 붙잡아 당장 퇴원시켜달라 요청했다. 장소는 병원 복도이자 간호사 데스크 앞이었고, 나를 모르고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 오가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할머니와의 관계를 묻는 그에게 당당히 손주 며느리임을 밝히고 이 이상 간병비를 소진할 경제적 여유가 없으며 이 집안에 할머니를 간병할 인력은 없음으로 요양병원에 가겠노라 주장했다. 피식 웃으며 한숨과 함께 퇴원 승인 서명을 휘갈기던 의사 얼굴은 평생 잊지 못하리라. 망할 새끼.

퇴원 승인이 떨어지자마자 미리 서류를 보내 놓은 요양병원에 전화를 해 앰뷸런스 이동을 요청했다.

이 모든 과정은 가족들 간의 사전 동의와 의견 조율을 기본으로 했으나 그 모든 과정에서 나는 검색과 질문과 문의와 수속을 스스로 해내야만 했다. 심지어 대학 병원복도 구석에 앉아 모바일로만 급하게 알아본 첫 번째 요양병원은 너무 열악해서- 새 병원을 다시 알아보기까지 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그녀는 내가 알아본 두 번째 요양병원에 입원했다. 요양병원마다 약간씩 다르지만 그 병원은 만약 할머니의 생사에 영향을 끼치는 의식불명이 발생할 경우 연명치료를 원하는지 물었다. 서약 서류 앞에서 원하지 않는다는 대답은 내가, 서명은 남편이 했다.


이렇게 이 모든 과정이 일단락되고 그녀가 요양병원에서 안락하고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계시다- 로 끝났다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그렇진 않았다.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에도 결석이 생겨 수술을 한번 더 하셨고 기타 여러 가지 노인성 질환으로 인해 대학병원을 오가셔야만 했다. 연락은 언제나 급작스러웠고 그때마다 보호자가 필요하기 때문에 나는 아들을 들쳐 안고 택시를 타야 했다.

인생, 방심하면 훅간다는 걸 굳이 몇 번씩이나 알려주실 필요는 없었을 텐데.

내 정신상태의 흐름을 읽고 혹자는 이거 그냥 정신승리 아니냐 너 그냥 호구 짓 한 것 같은데-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맞다. 정신승리다. 일이 어떻게 흘러갔든 간에 남일처럼 발 빼고 보고 있어도 전혀 내 잘못이 아니었을 텐데 굳이 정신승리까지 해가며 움직였던 것은 왜일까.
남편에 대한 사랑이었다고 하기엔 나는 끓는점이 비교적 낮은 편이다. 평생 누구와 연애를 하든 그러하였는데 그깟 결혼 좀 했다고 사람이 바뀌나. 감히 선언하건대 유난히 사랑하여 이 남자를 선택한 것은 아니외다. 미안하지만, 반신욕에 딱 좋은 온도 정도랄까? 그렇다고 진한 동료애를 갖추기엔 연애 기간도 결혼 기간도 너무 짧았다. 전통적인 여성의 가정에 대한 희생정신? 그런 게 있었다면 내가 산후우울을 앓지도 않았겠지.

나는 가장으로서의 의무와 정체성을 남자만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결혼과 즉시 나 또한 가장이다. 때문에 내가 고른 남자의 잠시 삐그덕거린 인생을 책임졌을 뿐이다. 뭣보다 나 역시 장녀로서 그의 책임감을 많은 부분 이해하고 있다. 중간에 좀 억울하긴 했지만 내 나이에서 오는 사회적 경험치와 짧은 결혼 생활을 고려하자면 뭐 그쯤이야.

언젠가 내 인생에 고난이 찾아온다면 이 남자 또한 나를 지탱하겠지. 집안에 기둥이 두 개면 더 좋은 것 아닌가.


이 모든 과정을 통해 나는 앞으로 살면서 양가 어른들에게 필히 찾아올 순간에 병실 앞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진 않을 것이다. 나름 경험치를 얻었다고 생각하니 그 또한 기분이 썩 나쁘지만도 않았다. 맘대로 안 되는 일에 긍정적으로 사고하는 방법은 세상을 사는 흔한 방식 중에 하나고, 이런 나를 만난 것은 내 남편과 시댁 식구들의 복이라고 생각한다. 뻔뻔하다고? 그러지 말아야 할 이유는 또 뭔가. 이 정도 생각으로 내가 덜 불행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하고 살아야 마땅하다.
무엇보다도 잊으면 안 되는 사실은, 인생은 회전목마라니까. 이 세상에 그냥 일어나는 일은 없으며 모든 일에는 이유 있는 결과란 것이 존재한다. 내 모든 시련에는 의미가 있으리라 믿었다. 실제로 그러하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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