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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쌀씨 Oct 24. 2018

1.건조 전쟁사

인류의 역사는 모든 것이 전쟁이다

하염없이 울리는 그 소리는 세탁기 소리가 아니다.

세상 참 좋아졌다.  벽에 커다란 연통 구멍을 뚫을 필요도 없고, 배관으로 물을 빼지 않고 물통만 비워줘도 OK. 이건 건조기 돌아가는 소리다.


나의 영자 씨는 옥상이나 자그마한 베란다 천장에 달린 건조대에 빨래를 널었다. 장마가 아닌 이상, 실내에서 빨래를 건조한다는 풍경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우리 집. 어렸을 때 내가 떠올리는 풍경 안에 빨래가 널린 실내는 없다. 그러나 그때는 미세먼지도 없었지.

이제 우리 시대는 더 이상 옥상에 빨래를 널 수 없다. 시대는 욕망을 낳고 욕망은 무기를 낳는 법. 하지만 무기는 돈이 든다.

내가 결혼하던 때만 해도 가스건조기가 대부분이었고, 전기 건조기는 전기 먹는 괴물취급을 받던 때였다. 오 년도 되기 전에 이만큼 발전하다니 한국의 강산은 2,3년 주기로 바뀌는 듯싶다. 어쨌든, 세탁기와 보일러로 과부하 직전인 베란다에 건조기를 놓을 자리는 없었고 결혼과 동시에 나는 빨래건조대를 구매했다.

대형 건조대를 본적도 구매해본 적도 없었던 나는 그 시점에 아주 큰 실수를 했는데 내가 사 온 건조대는 접을 수가 없었다. 항시 날개를 펼친 늠름한 건조대. 나는 매우 좌절하여 반품을 하려 했으나 그때- 남편이 날 말렸다.



결혼 준비과정에서 나는 남편에게 철저한 살림 분담을 요구했다. 제대로 대답하지 않고 우물쩍거리는 남편에게 내가 살림을 하면서 돈까지 벌어오라고 우리 엄마가 나를 학교에 보내준 것이 아니다. 너만 귀하게 컸다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이따위로 굴 것이라면 우리는 파혼이다-라며 건대역 모스버거에 앉아 선언했다.

그리고 나는 요리와 설거지를 할 테니 너는 빨래와 청소를 맡으라 명했다. 어째서 본인의 의견은 듣지 않고 멋대로 분담을 하느냐 반문하는 그에게- 여기서 요리란 그냥 있는 야채 때려 넣고 끓이는 카레나 계란 프라이, 햄 구이 따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네가 요리를 담당하는 순간, 내가 퇴근길에 칼칼한 동태찌개가 먹고 싶다 하면 그것을 끓일 수 있는 능력의 수준을 필요로 한다. 할 수 있겠느냐-는 말로 그의 말대답을 끊어냈다.(그러나 나는 동태찌개를 싫어하고, 끓여준 적이 없다)

어쨌든 그래서 남편이 빨래와 청소를 담당했고, 그런 그는 자신의 담당 영역을 어필하며 건조대의 반품을 차단했다. 그의 논리는 간단했다. 건조대란 전혀 접을 필요가 없는 물건이라는 것이다.


시댁에 처음 갔을 땐 그 위화감을 인식하지 못했다. 뭔가 이상한데 뭔지 알 수 없는 기분.

어쨌든 어머님이 해주신 고기반찬을 냠냠 먹고 돌아왔고, 그 순간의 위화감은 그냥 지나가 버렸다.

나중에서야 알았다. 그것은 바로 빨래건조대의 존재였다는 사실을. 먼저 결혼한 아가씨의 방에는 빨래건조대가 들어가 있었고 처음에는 살짝만 열려있던 그 문틈이 내가 결혼을 하자 활짝 열리기 시작했다. 그 생경한 풍경이 내 신혼집에서도 문제를 일으킬 줄이야.

미닫이 문이 달린 방 하나를 터 거실로 쓰고 투룸 형태로 바꾼 우리의 작디작은 빌라에서, 남편은 서재였던 방에 빨래를 널었다. 다행히 통풍이 잘되고 햇빛이 잘 들어오는 집 구조상 크게 습하지는 않았지만, 장마철에는 답이 없는지라 제습기를 구입해 사용했다.

그래, 거기까진 좋다. 근데 남편의 빨래건조대는 언제나 빨래가 있었다.

남편이 빨래를 걷는 시점은 새로운 빨래를 너는 시점이었고 덕분에 양 날개가 언제나 펼쳐진 그의 건조대는 워라벨이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실로 악독했다.

혹여 집 안에 빨래를 널더라도 밤에 널고 아침에 걷어 그 흔적을 싹 지워버렸던 나의 영자 씨와는 완전히 다른 생활방식이었다. 다소 충격적이었지만, 어차피 거실은 쾌적했고 서재방은 문을 닫으면 그만이었으며-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마음은 각자 다른 환경에서 자란 부부의 숙명이라고 생각했다. 뭣보다 나도 출퇴근이 바쁘니 그 꼴을 크게 인식하지 않고 살던 나날이었다. 내가 집에서 살림을 도맡아 하는 순간 문제가 되었지만.

나는 빨래건조대가 싫었다. 아이가 태어나면서 짐이 많아지고 우리의 서재방은 조금씩 살림을 줄여 아이방으로 바뀌어갔다. 자연스럽게 건조대가 거실로 나와야 했다. 빨래를 한 번에 몰아서 밤에 돌려, 다음날 오전에 얼른 걷어버리는 나를 남편은 이해하지 못했다. 옷의 로테이션이 꼬이자 그는 빨래를 더 자주 돌리라고 요구했다. 나는 싫었다. 그럼 이 접지도 못하는 빨래건조대를 계속 거실에 내놔야 하는데- 하루 종일 집에 있으면서 그 꼴을 보고 있는 것이 어찌나 싫던지. 적은 돈으로나마 열심히 꾸미고 살던 내 작은 거실을 파괴하는 최악의 몬스터가 바로 건조대였다. 덕분에 우리는 하다 하다 건조대 때문에 싸우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나의 효자 아들은 잡고 서기 단계에서 건조대를 잡고 섰다가 그 튼튼하고 한없이 흉물스러웠던 두 날개를 부러트렸고, 나는 소원하던 접이가 가능한 대형 건조대를 구입했다. 남편은 이전 것보다 많은 빨래를 널 수 없다며 투덜거렸지만- 마트에서 싸우는 한이 있어도 이것을 사야겠다는 나의 의지를 함부로 꺽지는 않았다.

한참 바닥 친 자존감 때문에 집안 살림 풍경에 한없이 예민하던 때였다. 나는 내가 구질구질한 살림의 흔적들 속에서 침몰하는 것을 용납하기 어려웠고 남편은 그런 날 이해하기 어려웠다.

남편이 집착이라고 부르는 의무감으로- 남들은 지키지 못한 거실과 주방을 지켜내며 모든 아기용품을 아이 방에 때려 박고 사는 나였는데, 빨래건조대는 최종 보스와 같았다. 도대체가 안 보고 살 방법이 없어서, 빨래를 널고 낮시간을 보내는 날은 한 없이 기분이 더러웠다. 아무리 집을 정리하고 블랙과 화이트와 그레이와 원목으로 깔끔하게 꾸며도- 빨래 건조대 하나면 그냥 자취방이 되어버렸으니까.

그러나 우리나라는 실내에서도 설치가 가능한 건조기를 출시하기 시작했다. 주부가 사회적으로 큰 대접을 받지는 못하지만 고객으로서는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는 나라가 아니던가. 그들은 우리의 심정을 같이 사는 남편보다도 잘 알고 있음이 분명했다. 내 애국심은 촛불시위 이후 최고 정점을 찍었다.


처음 건조기를 들이겠다 선언했을 때 남편의 시큰둥한 반응을 아직도 기억한다. 먼지에 한없이 민감해 이불 정돈할 때도 먼지가 난다며 질색하는 인간. 그런 인간이 대체 실내 빨래 건조에 대해서는 어찌나 부처마냥 자비가 넘치시는지. 반려자의 이율배반적인 행동에 살심이 느껴지는 나날이었다.

그래서 처음 건조기를 돌렸을 때 보란 듯이 먼지통을 보여주며 이게 다 네가 먹고 산 먼지라며 의기양양했었다. 남편은 아주 살짝 경악하는 반응을 보였을 뿐이다. 그것도 이모티콘으로. 그 속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나는 속이 다 시원했다. 망할 빨래 건조대를 잘 접어 안방 문 뒤로 유배 보내버렸기 때문에 남편의 반응 따위 내 알바가 아니다. 건조기 때문에 가뜩이나 좁던 거실은 더 좁아졌지만 나의 순백의 건조기는 깔끔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자리 차지하는 몫은 같지만 알록달록한 건조대와 새하얀 건조기는 집안에 끼치는 분위기가 전혀 다른 종족이다. 깔맞춤 앞에서 내 마음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그렇게 우리는 빨래건조대로 인한 싸움을 종식했고 나는 아직 건조기가 없는 모든 가정에 사랑과 평화가 깃들기를 기원하며 건조기를 찬양하고 있다. 식장에 들어갈 때 남편이 없어지는 한이 있어도 건조기는 꼭 신혼집에 들여놔야 한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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