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회전목마
42시간의 진통 끝에 결국 수술로 애를 낳은 나는, 처음 아들을 보고 내가 구황작물을 낳은 줄 알았다. 가뜩이나 애도 별로 안 좋아하는 여자라 임신 출산 육아에 대한 로망이 전혀 없었는데- 모성이라는 것이 출산과 함께 동시 장착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배웠다. 다행히 못생긴 내 아들은 내 젖을 먹으며 포동포동 살이 올랐고 아들에 대한 내 애정도 천천히 살이 올랐다.
3개월의 출산휴가와 1년의 육아휴직 끝에 나는 퇴직했다. 비록 나 스스로 퇴사 의사는 밝혔으나 그 의사에 잇몸 만개하며 애는 엄마가 키우는 것이 좋다 하던 상사의 표정은 결코 잊지 않으리. 어차피 돌아갈 자리도 없었던 것이다.
일을 하던 시절에는 다소 우울하고 몸이 좋지 않던 순간- 맛있는 것을 먹으며 기분을 풀었다. 화장품을 사고, 머리를 세팅하고, 하다못해 매니큐어라도 하나 구입해서 기분전환을 하던 나날. 근데 그 모든 것들이 사라지자 깨달았다. 내게는 생리 전 증후군 있었단 사실을. 어쩜 타이밍 좋게 퇴사하자 출산 후 첫 생리가 터졌다. 달에 한번 나의 기분은 바닥을 쳤다. 애가 있는 나는 그 이전에 하던 모든 기분전환의 행위들을 할 수 없었으니까. 애가 있어 외출이 어려웠고, 모유수유 중이니 머리도 못하고, 집에만 있으니 화장품은 줄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 모든 행위의 돈은- 남편이 벌어오는 돈이었다.
사실 내 우울은 이미 임신 순간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내가 임신을 하자 내 주위 모든 사람들은 내게, 혹 아이를 창밖으로 던지고 싶어 지면 꼭 나에게 연락하라는 말을 했다. 남편 역시 그런 기분이 들면 꼭 자신에게 말해달라고 신신당부를 하곤 했다. 그 정도로 나는 엄마라는 포지션이 안 어울리는 인간이었다.
스스로 우울함의 원인을 잘 아는 사람도 남에겐 그 사실을 잘 털어놓지 못한다. 자존심이 상하기 때문이다. 엄마로서 아이에 대한 애정이 한 방울 한 방울 쌓여가면서 내 자존감은 조금씩 말라비틀어지고 있었다. 자존감이 떨어지자 자존심이 높아졌고 그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 너무 어려웠다. 이 사회에서 나는 남편의 동의 없이는 신용카드 한 장도 못 만드는 인간이 되어 있었다. 쌓인 분노와 우울은 남편에게 터져나갔고 별 시답잖은 일에도 터져버리는 아내를 남편은 이해하지 못했다. 호르몬과 실직은 날 미치게 만들고 있었다.
나는 일이 하고 싶었다. 내 이름이 불리며 미션을 해결하고 상사의 인정을 받으며 한 달의 대가를 매월 통장에 꽂아 넣는 그런 삶. 출산 이전까지 당연했던 그 삶을 다시 찾고 싶었다. 그러나 내 경력으로 버는 돈이 뻔했으며 아이를 돌보며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 와중에 남편은 더욱 근무시간이 불규칙하지만- 그래도 정년이 더 길고 월급이 큰 직종으로 이직을 했다. 일을 싫어하는 남자는 가정을 위해 나아가고 있었고, 일이 하고 싶은 여자는 가정을 위해 주저앉아 있었다. 사실 애는 남편이 더 잘 보았고 지금도 잘 본다. 그는 젖먹이는 일 빼고 모든 부분에서 나보다 나았다. 그런데도 현실에서 우리의 포지션은 반대였던 것이다.
그는 내 우울의 원인을 알고서 나를 보듬었다. 내 말라비틀어진 자존감의 그릇은 남편이 뿌리는 단비에 잠시 촉촉해졌다가도, 다시 말라비틀어졌다. 한번 무너진 자존감은 쉽게 차오르지 않았다. 우리는 오래 싸웠고 오래 우울했다. 여전히 나는 남편의 신용도 없이는 신용카드를 만들 수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내 기분전환이라고는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아들의 인생 샷으로 바꾸는 일 정도였다.
그 와중에 남편의 여동생 소식을 들었다.
나는 아가씨나 서방님이란 말이 참 입에 안 붙지만, 그래도 의연하게 그 호칭을 해낸다. 대체 내가 왜 필요 이상의 존칭을 써야 하는지 납득하긴 힘들지만 마땅한 대용품이 없었던 탓이다. 나보다 나이라도 어리면 동생 취급이라도 하겠는데 심지어 나이도 많고 먼저 결혼했다. 그래서 요즘은 내 아들 이름+고모 혹은 고모부라고 부르려고 노력 중이다. 내 친정엄마가 그러하셨던 것처럼. 우리 엄마는 본인의 시누이들을 고모라고 불렀다.
그나마 그게 덜 이상하지 않은가.
여하튼 남편의 여동생- 이하, 고모 -는 여군이다. 장교인 그녀는 나의 시어머니이자 그녀의 친정엄마에게 아이 둘을 맡기고 있는 워킹맘이기도 하다. 가끔 내 눈앞에서 남녀가 임신 출산과 군대를 두고 무의미한(일이라고 우리 부부는 생각한다) 설전을 벌이면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한다. 군인으로서 두 번의 출산을 경험한 여자의 이야기 앞에서 좌중은 입을 닥치곤 했다.
그녀의 둘째 아이는 내 아들과 동갑이다. 때문에 인생 최대의 악다구니 기간을 보내고 있던 나에게 시어머니의 입에서 들리는 그녀의 직장과 관련한 소식들은 큰 자극제가 되었다.
나는 그때부터 스스로를 세뇌하기 시작했다.
나는 능력 있는 사람이다. 나는 얼마든지 다시 일할 수 있다. 애가 크면 어린이집에 보내자. 나는 대단한 사람이다. 나는 내 남편보다 더 능력 있는 사람이다.
나의 세뇌에 남편은 센스 있게 맞장구를 쳤다. 맞아 다시 일할 수 있어. 넌 일해야 되는 사람이야. 이러고 있을 사람이 아니지. 그냥 잠시 지나가는 순간이야.
지금 생각해보면 나를 조련하는데 매우 능숙한 인간이 아니었나 싶다.
살만해지면 일이 터지는 것이 우리네 인생사라던가. 흐름에 맡겨 나 좋을 대로 살던 내 인생에 육아 보다고 더 격정적인 사건이 터진 것 또한 그 무렵이었다. 일명 시할머니 사건은 바로 이 당시에 터졌다.
그것이 고모의 진급 이후였는지 이전이었는지 기억나진 않는다.
워낙 뺨 때리듯 이 일 저 일이 터져서 지금 와서는 어떻게 그 모든 것들을 해냈는지 이해가 안 될 지경이었으니까.
중요한 것은 그녀가 직장에서 스펙을 쌓아 갈 때 나는 인생 최대의 난관과 싸워야 했다는 사실이다. 옹졸해 보일지는 몰라도 내심 분하고 억울했음을 분명하게 밝힌다. 그녀의 진급은 그녀 개인의 노력에 달린 일이었겠지만 그 노력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진 것 또한 그녀의 팔자 덕 아닌가. 그 복이 너무 부러웠다.
지금 와서는 지난날 또한 내 스펙이요 나의 능력치가 커지기 위한 도약이었음이라- 도 닦는 어르신 마냥 중얼거리고 있지만 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