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에 흐려지기 전에 뱉어보는 나의 속내
우선 감히 선언하건대, 나는 그분을 그녀라 호칭하고 싶다. 말로는 못할 일이었고 앞으로도 못할 일이지만-
내 안에서 그분은 그녀다. 그것은 그녀와 나의 관계에 대한 심정적 정의이며 귀로 들은 그녀의 인생과 지금 그녀의 삶을 지켜보고 느낀 내 감정이 지정한 단어임을 밝힌다. 내게 있어 그렇게 불려야 함이 옳다.
내게는 시할머니가 계신다.
한때 그녀는 내게 있어 일 년에 두어 번 뵙는 지극히 이벤트적인 존재였으며 일 년에 두어 번 불필요한 물건들을 선사해주시는 NPC 같은 인물이었다.
결혼 전 나의 외할머니는 명절 때마다 자식들에게 정체를 알 수 없는 브랜드의 양말들을 한 아름 안겨주셨고 그것이 본인의 쌈짓돈을 털어 구입한 의료 기기의 사은품이었단 사실을 성인이 되어서 알았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보니 나의 시할머니는 외할머니 못지않은 의료기기 업체의 VIP 셨다.
그녀의 작은 집에는 그 의료기기 업체에서 구입한 물건과 사은품이 가득했는데, 명절 인사를 가면 그 수많은 것들을 본인의 며느리와 손주 남매와 그 내외들에게 헌정하셨다. 넘치는 은혜에 감복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는 점에서 참으로 안타까운 현장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매번 명절마다 원료가 불분명한 비누와 치약과 소금과 설탕 그리고 썩은 물도 청정수로 만들어 준다는 마법의 컵과 그릇과 미니항아리 등을 받아와야 했고 지금 생각해보면 별거 아닌 그 일들이 큰 스트레스였다.
그러나 같은 피해자인 남편을 구박할 수도, 시어머니도 어려울 마당에 무려 시할머니를 타박할 수도 없었다. 때문에 우리 부부의 짜증은 노인네들 등쳐먹는 의료기기 업체 직원들의 것이 되었다.
처음엔 찜찜해서 안 쓰던 비누와 치약을 결국엔 쌓이고 쌓여 사용하기 시작했고 홀로 사는 노인에 대한 애처로움은 이 모든 분노를 쉬이 가라앉혀 주었다.
애당초, 노인이 그토록 등쳐먹기 쉬운 존재가 된 이유는 그 불필요한 소비가 고독을 전제로 하기 때문 아니던가. 그녀의 고독을 슬퍼하며 그녀의 결제를 원망하리라.
물론, 그 망할 놈의 마법의 그릇세트와 미니 항아리는 냉장고 위에 박스채로 봉인되었지만.
그러했던 그녀가 어느 날 위암판정을 받으시며 모든 일이 시작되었다. 연세에 비해 치아가 성하시고 먹성도 건강하시던 분이 속이 답답해 동네 내과를 찾았다. 의사는 큰 병원에 가볼 것을 권했고 가까운 강북삼성병원에서 검사를 받은 그녀는 위암 1기임을 알았다. 그리고 그 소식은 그녀의 며느리를 통해 이 집안의 유일한 장손인 내 남편, 그에게 닿았다.
내 아들은 이 집안의 3대 독자다. 그 말인 즉, 남편도 독자. 돌아가신 아버님도 독자 시라는 이야기. 더불어 외동아들이셨던 아버님의 별세로 3대 안에 직계어른이 안 계신 집안이란 이야기이기도 하다.
연애할 때 농담처럼 본인이 2대 독자라 말하는 남편에게 요즘처럼 애 한둘 낳는 세상에 널린 게 독자라며 면박을 주었던 나는, 그것이 얼마나 심각하고 큰 문제인지 인식하지 못했다. 독자인 남편이 저 먼 지방 한 구석에 여기저기 흩어진 집안 땅을 모조리 물려받아 매해 너무나도 소박한-서류상 평수는 몇천 단위인데 청구금액은 만원 단위인-재산세를 낼 때도 전혀 몰랐다. 그냥 치킨 몇 마리 값 날아가네 싶었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집안에 일이 생기면 그 모든 것을 처리해야 할 의무를 지닌 자 역시 이 남자란 사실을.
시할머니의 수술 날짜가 잡혔다. 수술은 간단히 끝날 것이라고 했다. 워낙 초기에 발견되었는 데다가 연세가 많으셔서 설사 병세가 깊었다한들, 추후 재발 한들, 항암치료를 고려하지 않는다고 했다. 많은 검사와 입원 수속 그리고 간병인을 구하는 일이 생겨났다. 갓 이직한 남편과 그의 동생 부부는 직장에 나가야 했고 시어머니는 곁에 끼고 돌봐야 하는 둘째 손주가 있었다. 내 남편은 이 사태의 급박한 수습을 나에게 부탁했고, 짧은 시간은 아이를 봐줄 수 있다는 친정엄마에게 아들을 맡겼다.
한쪽 귀가 들리지 않아 보청기에 의지하며 등이 굽어 지팡이를 짚는 노인과 병원을 오갔다. 평생 접점이 없었던- 결혼 이전에는 결단코 타인이었던 노인의 모든 몸상태와 앞으로의 몸상태를 설명받았다.
젊어서 앓으신 결핵으로 폐 한쪽이 사실상 기능을 하지 않는다는 할머니의 희고 검은 사진은 이 집안에서 나만 보았다. 굽어서 펴지지 않는 그녀의 척추뼈 사진 또한 내가 보았다. 수술방법과 수술 후 생활에 대한 설명 또한 내가 들었다. 병원은 무언가를 설명할 때마다 나와 그녀의 관계를 매번 물었고, 나의 답변을 단번에 이해하는 자가 없었으며- 그들은 과연 내가 이 서약서에 서명을 해도 법적으로 문제가 없을지 고민했다. 그녀와 나의 거리는 그만큼이나 먼 것이었다. 관계를 말하는 그 순간 서명을 받으러 온 인턴 혹은 레지던트와 나의 사이에서는 아주 잠깐 침묵이 감돌았다. 그들은 말하지 않았지만 속이 뻔히 들려왔다. 너 왜 여기 있니. 그들은 나를 어디 신파에나 나올 법한 시댁에 착취당하는 불쌍하고 모지란 손주며느리처럼 생각했을 것이다. 앞뒤 사정을 모른다면 나 역시 그러했을 것임으로.
나는 대체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결혼 전 인사와, 결혼식 당일, 그리고 겨우 몇 번의 명절에만 나를 보았던 그녀는 몇 번이고 고맙다며 나를 보듬었다. 그 주름지고 따듯한 손끝에서 나는 할 말이 없어 그저 웃었다.
우리 부부는 고작 결혼 2년 차였다.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그녀의 똥오줌을 받은 적도 없고 딱히 체력을 요하는 수발을 든 적도 없으며 간병인을 못 구하던 때 그녀의 옆에서 쪽잠을 잔 것은 외손주를 딸에게 바통 터치하고 온 그녀의 며느리였다. 흔히 생각하는 신파를 찍을 정도로 고생한 것은 아니지만 이제 갓 서른이 넘은, 엄마 아빠 밑에서 제 월급 다 까먹으며 큰 인간이 마주하기에는 생경하고 너무나 어른스러운(?) 일들이었을 뿐이다. 무엇보다 모든 직접적 상황을 거의 내가 감내해야 했다는 점에서- 나는 그 무게가 너무 무거웠다. 그뿐이다.
그래서 몰랐다. 도대체 내 남편이 왜 본인 쉬는 날까지 날 데리고 할머니와 관련된 일을 처리하려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어떤 날에는 속이 뒤틀려 이 인간이 본인 할머니는 내가 전담이라고 생각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도 혼자 하지 않으려는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느 날, 기어코 나는 터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