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몸 이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선 Jan 10. 2017

생리컵 도전기

일회용 생리대에서 면생리대, 생리컵까지

  고등학교 때부터였나. 생리를 시작하고 하루, 이틀 정도는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이 울렁거리고 허리가 끊어질 듯 했다. 그런 날은 그냥 달력에서 없는 셈 치고 꼼짝없이 누워 있어야 했다. 억울했다. 운 좋게 생리통이 없이 달을 넘기는 친구들이나, 아예 생리라는 걸 안 해도 되는 남자 애들에 비해 내 몸은 비효율적인 것 같았다. 무엇보다 통증의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고, 몇 가지 의심 가는 요인들-밖에서 사 먹는 음식, 당시 살던 집 근처 화학공업단지에서 나오는 매연, 집에서 쓰는 플라스틱 물병 등-이 있다 해도 맞벌이 가정의 딸, 그리고 대한민국의 고3으로서는 어지간한 귀찮음을 감수하지 않고서는 제거 불가능한 요인들이었다.

  변화를 시도할 수 있게 된 건, 대학에 입학하고서도 한참 뒤, 졸업을 앞두고 백수가 되고 나서였다. 남는 게 시간이 되자 '면 생리대를 한 번 써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여성단체에서 근무하고 있던 친구 덕에 면생리대 완성품 몇 개, 키트 몇 개를 얻어 사용해 볼 수 있었다. 거기에 어릴 적 입던 면 티셔츠를 잘라 몇 개를 더 만드니, 한 주기 동안 사용할 만큼의 면생리대가 생겼다. 직접 사용할 거라고 생각하고 한땀 한땀 바느질 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원래 손으로 뭘 만드는 걸 좋아한다.) 바느질을 한땀씩 하면서 '생리통아 사라져라'라고 주문도 외웠던 것 같다.

직접 만들어 쓴 면생리대.

  그렇게 얻고 만든 면생리대는 결과적으로 생리통을 줄여주진 않았다. 그렇지만 쓰레기가 적게 나온다는 점, 피부에 무리가 덜 간다는 점이 좋아 한동안은 면생리대를 주로 사용했다. 생각보다는 빨래도 번거롭지 않았다. 무엇보다 생리 양이 적을 때 일회용 생리대를 쓰면 피가 굳어서 밑이 쓰라린 경우가 많았는데, 면생리대를 쓰니 밑이 까끌거리지 않는 게 좋았다. 그렇지만 시험이 몰려 있는 달에는 도무지 일주일치 면생리대를 손빨래 해 널고 잠이 들 자신이 없어, 1~2년쯤 지나고 나서는 다시 일회용 생리대로 돌아왔다. 몸에 좋고, 지구에도 좋은 라이프스타일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시간적 여유가 많은, 그러니까 짧게 일하고도 생계 유지가 가능한 사람이어야 했다. 지금은 몰라도 앞으로 취직을 하고 나서도 과연 그런 '호사'를 누리며 살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감이 들었다.

  생리컵이라는 게 있다는 걸 들어서 알고는 있었는데, 일회용 생리대로 돌아오고 나서도 한동안은 막상 직접 사용해 봐야 겠다는 생각은 딱히 안 들었다. 그러다가 얼마 한국일보에서 국내에선 식약처가 '관련 규정이 없다'는 이유로 의약외품 허가를 내지 않아 생리컵 생산과 유통이 불가능하단 사실을 기사화 한 걸 보고는 직접 구매해서 써 봐야 겠다는 결심을 별안간에 하게 됐다. (이것도 원래 알고 있던 사실인데, 왜 하필 이 기사를 보고 이런 생각이 들었을까..?) 또 언젠가 남자친구, 그리고 동생이 내가 면생리대를 쓰고도 생리통에 호전이 없자 지나가는 말로 "생리컵을 한 번 써 보는 건 어떠냐"고 말해 줬던 것도 은근 영향이 있었던 것 같다. (이런 게 '약한 링크'의 영향력이라는 걸까? 그렇다고 하기엔 정작 포문은 내가 직접 열었다.)

  마음을 먹고 나니 구매는 생각보다 쉬웠다. 이틀 정도 검색을 해 보니 여러 브랜드 중에 '레나컵'(lena cup)이 초보자가 쓰기에 좋다고 하기도 하고, 더 고민하기도 귀찮아 동생을 꼬득여 스몰, 라지 사이즈가 함께 들어 있는 세트 두 개를 주문했다. 미국에서 오는 거라 배송료가 좀 돼, 총 10만원 정도 들었다. 두 자매가 그동안 일회용 생리대를 사는 데 들었던, 그리고 앞으로 들(어야 했을) 돈을 생각하면 그리 비싸지 않았다(생리컵은 반영구적으로 쓸 수 있으므로.)

패키지가 예쁘다. Healthy and Concious
레나컵 스몰+라지 세트. 패키지에 튤립이 그려져 있는데 레나컵도 튤립 모양이다.

  주문을 한 지 열흘 정도가 지난 뒤에 집으로 배송이 왔다. 열어 보니 패키지 디자인이 무척 예뻤고, 생리컵 자체도 아기자기 한 게 생각보다 덜 무섭게 생겼다. 배송이 오고 나서 일주일 정도가 지나자 생리가 시작됐고, 기대 반 걱정 반 사용을 시작했다. 배송이 오는 동안, 그리고 생리를 기다리는(!) 동안 틈 나는 대로 후기를 검색해 생리컵을 몸 안에 넣는 방법을 여러 번 시뮬레이션 해 둬서 그런지,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삽입에 성공했다. 생리컵을 질에 넣기 좋은 크기로 접어서 넣은 뒤 자궁 경부 근처에서 잘 펼쳐져 흡착이 되어야 새지 않는데, 초보자의 경우 몸 안에서 생리컵이 펼쳐지지 않아 새는 경우가 많다는 후기를 많이 봤었다. 나는 다행히 한 번에 성공했고, 처음 며칠 동안만 혹시 몰라 일회용 생리대를 겸용했던 걸 빼고는 첫 주기에 바로 생리컵만으로 생리혈을 받아낼 수 있었다.

  아마 생리컵을 앞으로도 쭉 사용할 것 같다. 일회용 생리대-면생리대-생리컵으로의 여정을 떠나게 한 본래 목적인 생리통 완화에도 과연 효과가 있을지는 생리컵을 더 써 봐야 알겠지만, 꼭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초기 구입 비용 외에는 추가로 돈이 들지 않는다.

쓰레기 배출을 줄일 수 있다.

일회용 생리대나 탐폰과 달리 피부에 자극이 없다.

면생리대처럼 귀찮게 빨래를 쌓아두지 않아도 된다.

탐폰을 쓸 때 처럼 급성 쇼크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수영장에서 옷을 갈아 입을 때나 화장실에서 볼일을 볼 때 탐폰 실이 삐져나오지 않아 걸리적거리는 게 없다.

생리대에 비해 더 오랫동안 착용하고 있을 수 있다.

침대에서 마구 굴러도 샐 걱정이 없다.

등의 장점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그런데 생리컵을 배송 받고 나서 엄마에게 무심코 보여 줬는데, 돌아온 반응이 상상 이상이어서 따로 적어 둔다.

  "엄마, 이거 이렇게 접어서 탐폰처럼 넣는 거야."라고 자랑(...)을 하자 바로 "얘가 정신이 나갔나!"라는 호통이 돌아왔다. 나도 지지 않고 "왜, 이거 적응만 하고 나면 엄청 편하대. 외국에선 많이들 쓴다던데."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엄마는 "그건 외국 애들은 성 경험이 있으니까 그런 거지, 그럼 너도 있니?"하고 쏘아봤다.

  엄마가 별로 달가워 하지 않으리라고는 생각 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래서 못 들은 체 하고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다.

  나중에 남자친구에게 엄마와 있었던 일을 말 하자, "아마 우리 엄마도 (딸이 있었으면) 그런 거 싫다고 할 걸."이라고 해서 같이 웃었다. 아직까지 여성의 몸 안에 뭘 넣는다는 건 한국에서 쉽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운가보다. 엄마와도 이런 대화를 조금씩 해 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