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3일,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한 껏 들뜬 독일에서 나는대만과 한국인 유학생 친구들과 BMW 박물관을 갔다가뮌헨 중심지로 이동했다. 마리엔 광장을 지나 뮌헨을 대표하는 맥주 양조장인HB,호프브로이하우스에 가기 위해서였다. HB는 1589년부터 왕궁으로부터 시작된 역사를 가졌고, 3,0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크기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홀에 들어서자 높은 천장과 바이에른 양식의 화려한 건물이 눈길을 사로잡았고, 흥겨운 음악과 시끌벅적한 분위기에 또 한 번 매료되었다.
친구들을 따라 시그니처인 1L 맥주를 시켰다. 한 손으로 들기에도 무거운 거대한 유리잔에 찰랑찰랑 맥주가 담겨 나왔고, 맥주잔이 워낙 커서 내 얼굴이 가려질 정도였다. 와우! 무엇보다 지금 시각은 오후 3시. 우린 대낮의 맥주를 소시지와 함께 여유롭게 즐기고 있었다.
그 사이, 나는 한국인 유학생과 조금씩 친해졌다. 틈을 타서 한국말로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는 근자감이 넘치는 아이였다.(*가명: 혁이) 어멋? 나랑 똑같잖아? 혁이는 자존감과 자기애가 높아 보였고 자신감은 충만했다. 가까워질수록 장난기 있는 모습이 나왔고 철없어 보이지만 매너 있는 척 행동하고 허풍이나 허세도 양념처럼 유머로 곁들이는 특유의 친근한 매력이 있었다.본인이 로이킴을 닮았다고 우기기도 했다.
"나 로이킴 닮았다 해서 인기 많았어!"
"로이킴? 내가 아는 그 로이킴?? 아무리 봐도 모르겠는데. 희한하네. 목소리가 닮았나? 네가 직접 지은 별명 아냐??"
"아니야~ 로이킴 닮았다고 중대 인기투표 1위 했어"
"뭐?? 지금 군대에서 남자들한테 인기 많았다는 거였어?? 푸하. 그래도 로이킴은 좀 너무했다. 지금은 전혀 안 닮았는데...ㅎㅎ"
"아놔~~ 나 옛날 사진 보면 오늘 밤 잠 못 잘 텐데! 감당되겠어???"
"아이코ㅋ 잠 못자보고 싶다. 어디 보여줘, 보여줘 봐"
"자.. 잘 봐!! 흠흠! 바로 이거야!!"
"어이쿠. 어쩌냐. 잠이 잘 오겠는데? 벌써부터 졸려서 하품 나오네ㅋ"
혁이와 장난을 치다가 곧 영국 유학생활의 단상을 얘기나누기도 했다. 우선 유학생의 고충으로, 영국 집값이 너무 비싸서 삼삼오오 모여산 다고 했다. 또한 영국에서 알아주는 명문대여도 한국에서 네임밸류가 적은 외국 대학교라면 상대적으로 그 가치를 잘 알아주지 못해 취업에서 이득을 보기 어렵다는 점이 있었다. 또한 해외 네트워크 기반이라 국내 학연에서 밀릴 수도 있다. 비싼 학비, 높은 주택가격과 생활비에 비하면 아쉬울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졸업반 때는 유럽의 각 기업에서 대학교를 찾아와 면접을 보고 인턴십을 하게 되는데 본인도 유명한 외국계 회사 인턴십에 합격했다고 했다. 그것만으로 이미 남들과 다른 경쟁력을 갖추게 되는 것 같았다.
내가 가보지 않은 길을 지구 반대편에서 가고 있는 친구들의 이야기로 들으니 간접경험도 되고 흥미로웠다. 만일 나도 유학을 하게 되었다면 또 어떤 인생이 펼쳐졌을까? 혁이는 멀고 먼 유럽에 사는 대학생이지만 내가 알고 지내는 한국의 친구, 후배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이 평범하고 친근한 옆집 동생처럼 보였다. 그러나혁이의 가장 큰 다른 점을 봤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그는 우리가 광장을 거닐거나 잠시 짬이 나서 핸드폰을 할 때 손으로 슥슥 올리면서 무언가를 읽고 있었는데 그건 바로 BBC 뉴스였다. 마치 우리가 버스 기다릴 때, 포털 사이트 뉴스를 시간 때우기처럼 슥슥 올리며 눈길이 가는 뉴스를 클릭해서 읽듯이, 혁이는 그걸 BBC 뉴스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아무렇지도 않은 평범한 일상이 그를 돋보이게 했다.
와.. 나는 BBC 뉴스를 영어스터디 하면서 억지로 책 펴서 밑줄 그으면서 공부했는데. 하기 싫은데 꾸역꾸역 읽고 독해하고 과제하면서 어쩔 수 없이 봤는데. 그럼에도 어렵고 재미없으니 결국 얼마 못 가 그만두었는데 그 BBC를 심심할 때 영어공부 겸 세상의 흐름 파악 겸 슥슥 보고 있다니. 글로벌 인재가 되는 길은 이렇게 작은 습관부터 다르구나.
대만남 친구는 DSR 카메라를 하루 종일 들고 다녔다. 어제 모임에서도 우리 단체사진을 찍어주더니, 여행하며 사진 찍고 매일 업로드를 하는 게 여행의 즐거움이라고 했다. 특히 여행하며 만난 다른 사람들 사진도 찍어주고 그들에게 전송해주기도 했다. 그의 사진 취미는 여행지에서 낯선 이들과 경계를 허물고 쉽게 친구를 사귀는 수단이 되어주기도 했다. 타인을 위해 멋진 사진을 남겨주니 어쨌거나 이타적인 모습이 좋아 보였다.
또 다른 대만여 친구는 귀여운 소녀 같은 이미지였다.본인을 요란하지 않고 수수하지만 멋스럽게 잘 꾸밀 줄 알았다. 예를 들면 청바지를 입었지만 멋스러운 스카프를 두르고 귀여운 털모자로 포인트를 줘서 본인을 은은하게 돋보이게 했다. 뽀얀 피부에 아이 같은 미소를 지어 보일 땐 여자인 나도 빠져들 것 같았다. 한국을 좋아한다며 관심을 보여서 더 예뻐 보였나? 머리를 예쁘게 컬을 했길래 어떻게 했냐고 물었더니 한국 유튜브를 보고 롤로 전날 밤 말고 잤다고 했다. 나도 모르는 걸 나보다 더 잘 찾아서 보고 있었다. 옷은 어디서 사냐고 했더니 한국에서 종종 직구도 한다고 했다. 그녀에겐 매력만점 한국인가 보다.
우리는 HB 양조장을 나와 마리엔 광장을 거닐었다. 온갖 종류의 치즈와 농구 골대 판처럼 커다란 치즈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져서 사진도 찍고 치즈도 사며 돌아다녔다. 거리의 악사에 발걸음을 멈춰 음악감상도 했다. 크리스마스트리와 장식이 곳곳에서 절제된 아름다움을 뿜어냈다. 심플하면서도 화려한 뮌헨의 야경을 감상하고 우리는 디저트 카페로 향했다. 셋은 합창하듯이 내게 말했다.
"레나~ 내일 우리 스키 타러 갈 건데, 같이 가자~!!"
독일에서도 알프스산맥의 스키를 탈 수 있다는 놀라운 정보였다. 뮌헨에서 가깝고 접근성도 좋아 인기가 있다고 했다. 눈이 내리지 않는 대만 출신 친구들은 기대가 한가득이다. 스키를 타 본 적이 없지만 눈망울은 기대감으로 초롱초롱했다. 내게도 재밌을 테니 함께하자며 눈빛을 발사했다.
나는 스키를 탈 줄 모른다. 그리고 알프스 산맥에 대한 기대감보다는 초보가 겁도 없이 알프스에서 첫 스키 도전은 무모해 보였다. 또한 '허리디스크' 환자로서 겨우겨우 온갖 노력으로 허리를 치료했기에 허리를 다칠 수도 있는 스키는 더욱이 쳐다보기도 싫었다. 허리가 아픈 상황으로 돌아간다면 너무 끔찍할 것 같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춥고 긴장된 유럽 여행 탓에 허리가 조금씩 욱신거리고 있는 찰나였다. 가지 말라고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았다.
"음.. 아무래도 난 스키장은 안 되겠어. 정말 아쉽지만 너희들끼리 다녀와".
이 말은 우리는 오늘을 마지막으로 헤어져야 한다는 의미였다
"왜? 왜?? 우리도 스키 잘 못타ㅎㅎ 같이 가서 배워서 타보자~~"
"아니야. 난 스키 좋아하지도 않고 타고 싶지도 않아. 그리고 무엇보다 허리도 아파서 스키 타는 건 위험할 것 같아"
"조심히 타면 되지~~ 그러지 말고 같이 가자~~~ 정말 재밌을 거야!"
"아니야.. 난 못 가.. 흑흑"
"아이~ 누나! 내가 스키 가르쳐줄게. 내가 스키 경력이 높아서 누나 정말 쉽게 잘 가르쳐줄 수 있어! 내가 가르쳐 줄 테니 같이 가자!!!"
"네가 무슨. 강사도 아니면서"
"누나, 나만 믿고 따라와. 내가 책임지고 가르쳐줄게!"
"아니야.. 난 싫어"
"그럼 리프트만 타~~~ 그것도 재밌잖아! 어때?"
나는 여러 차례 거절했다. 나도 마음 맞는 친구들과 헤어지기 아쉬웠지만 스키장만 아니라면 어디든 함께 할 요량이었다. 그만큼 스키장은 두려움도 크고 위험해 보여서 하기 싫었고 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배울 마음도 없었다. 그런데 이 친구들... 포기를 모르는 친구들이었다. 내가 어떤 이유를 대도 다른 대안을 제시하며 손을 내밀었다. 특히 혁이 녀석은 집요했다. 내가 꼭 같이 가길 바랐다.
아니, 나 벌써 핵심멤버 된 거야? 원래 나 없이 셋이서 가려던 거였잖아~ 왜 이렇게 끝없이 설득하는 거지? 이놈의 인기. 후핫. 벌써 내 매력에 빠진 거야?? 그래도 스키장은 곤란해. 난 정말 못 가는 상황이라고. 내 소중한 허리라도 다치면 어떡해. 결국 그 책임은 선택한 내 몫이 된다고. 난 안 갈 거야. 안 갈 거라고!!!혁이가 스키를 가르쳐줄 케니 자기만 믿고 따라오라고 할 때 살짝 흔들리기도 했다. '남자 친구에게 스키 배우기'라는 내 로망을 가로채게 둬야 하나? 어쩌지? 그래도 알프스는 너무 거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