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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achK Nov 02. 2020

영화 속 어느 작가들

《미드나잇 인 파리》를 보며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는 어떤 젊은 작가가 등장합니다. 영화 속 당시의 파리에는 날마다 술을 마시고, 날마다 글을 쓰는 평범하고 젊은 기자 출신 작가 지망생이 하나 있었습니다. 제대로 몸 누일 곳도 없이 다락방에서 젊은 아내와 하숙을 해야 하는 처지였지만 그는 자기 처지를 비관하지 않았습니다. 《파리는 날마다 축제》라는 회고록에 이런 말을 남깁니다.



ㅡ파리에서, 우린 젊었으며 그곳에서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없었다. 가난조차도. 갑작스런 생활의 여유도, 달빛도, 당신 옆에 누워 있는 누군가의 숨소리도.



《파리는 날마다 축제》 中







 유망했지만, 명성은 얻지 못하고 있었던 그를 구해준 친구가 F. 스콧 피츠제럴드였습니다. 소위 '재즈 세대'라 하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청춘이었던 시절의 총아인 피츠제럴드는 그 시절에 미국의 가장 로맨틱한 부분들을 써내려갔습니다.


 문명을 떨치기 전, 젊은 시절의 피츠제럴드는 미국을 통틀어 가장 미인이라는 소문이 도는 처녀 젤다 세이어를 사랑했습니다.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젤다 세이어를 차지하기 위해 가난한 청년 피츠제럴드는 열정을 다해 소설ㅡ《낙원의 이쪽This side of paradise》ㅡ을 써내려갔고, 그게 그대로 성공해서 단숨에 문단의 총아가 되어 소원대로 젤다 세이어를 차지했습니다. 소설 같은 이야기입니다. 《위대한 개츠비》의 제이 개츠비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본인이었던 셈입니다.



 1920년대에 세계 역사를 통틀어 유래없는 호황기를 맞은 미국 사교계에서 프린스 스콧, 프린세스 젤다란 별명이 붙은 젊은 부부는 대단한 화젯거리였다고 합니다. 사교계의 모든 떠들석한 파티에 빠지지 않고 참가한 피츠제럴드가 중간중간 아무렇게나 써제낀 소설들, 성의 있게 썼다고는 하기 어려운 이 소설들이 또 대단히 흥행했습니다. 1929년에 대공황이 오기 전까지, 부풀대로 부푼 미국인들의 꿈이 갑자기 꺼지기 전까지 10년 간 피츠제럴드는 그게 젤다에게 자신의 모습을 각인하는 유일한 수단이라도 되듯이 소설을 썼고, 모두 성공했습니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처럼, 파리에서 피츠제럴드 부부가 젊은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만난 것도 1920년대의 일이었습니다. 한눈에 헤밍웨이의 재능을 파악하고 적극적으로 출판사와 편집인들에게 어필해서 헤밍웨이의 성공을 도운 것도 피츠제럴드였습니다.


 헤밍웨이는 그런 피츠제럴드에게 우정 외에, 작가적인 호기심도 생겼던 모양입니다. 《위대한 개츠비》를 쓸 정도의 인간이 뭐하느라 진득이 책상 앞에 앉아 소설을 쓸 생각을 안 하고 있는지 파악해본 바, 피츠제럴드의 아내 젤다 세이어가 원흉이라고 생각해서 피츠제럴드에게 젤다와 헤어지라는 충고까지 했었습니다. 여러 모로 젤다 세이어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사이는 극도로 좋지 않았습니다.



 크산티페, 콘스탄체, 소피야와 같이 위대한 인물의 악처로 평가받지만, 실제로는 시대를 앞서나간 총기를, 어쩌면 남편보다 더 인정받는 젤다 세이어도 가만히 듣고만 있을 성격이 아니라 어니스트 헤밍웨이에게 이런 비아냥을 남깁니다.



 "그는 가슴에 털이 난 계집애야."



 불행하게도, 서로를 통찰하여 남긴 악평은 그대로 실현되어 서로의 가슴을 찌릅니다.






 1929년 대공황 이후, 1920년대 호황기의 아이콘 같았던 스콧 피츠제럴드는 흡사 헤어진 애인의 사진 액자를 엎어놓는 것처럼 누구도 찾지 않는 작가가 되었습니다. 피츠제럴드의 몰락과 더불어 젤다 세이어가 먹는 욕도 늘어가면서 정신분열증으로 정신병원을 들락날락하게 됐습니다. 그러다 입원한 정신병원에 난 화재에 휘말려 1948년에 사망합니다.



 피츠제럴드는 1940년에 이미 아내보다 먼저 사망하기 전까지 끊임없이 소설을 썼습니다. 피츠제럴드가 위대한 작가인 이유는 그가 훌륭한 소설을 썼다는 점이 아니라, 이미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상태가 되어도, 빚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불어나고 있어도, 알콜 중독이 그의 정신을 좀먹어 들어가도,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와는 이미 소원해졌어도, 자신의 글을 끝까지 믿었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1934년, 17번이나 고쳐 써서 완성시킨 소설 《밤은 부드러워Night is tender》에 대한 평가를 그는 파리에서 만난 옛 친구, 자신과는 다르게 1929년 이후 '로스트 제너레이션'의 선두주자로 인정받으며 대단한 경력을 쌓아나가고 있는 헤밍웨이에게 평가해달라고 부탁하자 헤밍웨이는 딱 한 마디만 남겼다고 합니다.



"계집애처럼 징징대는 소설이로군."






 1940년에 피츠제럴드가 사망한 후에도 헤밍웨이는 오랫동안 작가 생활을 이어나갑니다. 1961년에 사망하기 전까지 그는 열 명이 넘는 하인에 과수원까지 딸린 대저택의 소유자였고, 퓰리처상에 노벨문학상까지 섭렵했습니다. 순전히 자신의 글로써 쌓아올린 것들입니다.



 허나 그는 창가로 스며드는 달빛도, 가난도, 옆에 누워있는 사람의 숨소리조차도 달콤했던 시절로 다시는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그 시절로부터 얼마 지나지도 않아 자신의 옆에 누워 숨소리를 들려주던 사람과 이혼해버렸고, 다시는 그 행복했던 시절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명성을 쌓아갈수록 무절제한 충동과 모험심에 휩싸여 살았고, 최후에는 그 손, 항상 글을 써왔던 두툼하고 단단했던 손으로 엽총의 방아쇠를 당겨 스스로를 끝장냅니다. 끝내 자신의 글을 믿었던 자신의 옛 친구, 스콧 피츠제럴드와는 상반되는 최후였습니다.


 옛 친구, 스콧 피츠제럴드는 끝끝내 자신의 글을 믿음으로써 '개츠비 the Great' 그 자체가 되어 남았습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조금만 더 확신했다면 '산티아고 노인' 그 자체가 되어 기억 속에 남겨졌을텐데, 끝끝내 확신하지는 못했다는 점이 아쉽고 안타깝습니다. 조금 더 믿지 못함으로써 산티아고 노인이 아니라, 산티아고 노인이 잡은, 불행했던 청새치가 되어버린 것이 작가, 그리고 인간 어니스트 헤밍웨이에 대한 한가닥 아쉬운 점입니다.





ㅡ나는 글을 쓰려고 세상에 태어났고, 여태까지 글을 써왔으며, 앞으로도 글을 쓸 거야. 장편이든 단편이든 내 글에 대해 사람들이 하는 말, 누가 쓴 글이냐는 등의 말에 나는 전혀 개의치 않을 거야.


......



어니스트 헤밍웨이, 《파리는 날마다 축제》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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