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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유 Apr 06. 2024

감정에도 개인주의가 필요해


상처 입은 마음의 억울함


심리상담소에서는 가끔 이런 설움의 목소리를 만나곤 합니다.


"진짜 고쳐야 할 문제가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인데, 제가 제 돈과 시간을 들여서 심리상담을 받아야 한다는 게 억울해요."


세상엔 참 많은 빌런들이 살고 있습니다. 똑같은 말도 꼭 밉게 하고, 인신공격성 발언을 하고,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모르며, 수치심도 없이 이기적이고 착취적인 사람들.


그리고 우리는 빌런을 처단하는 '참교육'에 열광합니다.


그렇다면 심리상담소에서는 어떻게 그 마음을 치유할 수 있을까요? 빌런을 데려와서 참교육 시킬 수도 없는데, 과연 내 속이 풀릴 수 있을까요?


***심각한 괴롭힘으로 일상생활이 불가능하고, 내가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수준의 트라우마를 갖게 되었다면 보다 더 세밀하고 전반적인, 언어와 몸을 함께 다루는 치료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말 때문에 분개하고, 얼굴만 봐도 밉고, 분노와 미움을 달고 사는 게 괴로워서 마음을 비우고 싶다면, '참교육'이나 '복수극' 대신에 내 마음을 돌아보며 치유하고, 이를 통해 성장해 나가는 길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나의 감정은 내 것입니다.


나에게 상처를 빌런을 데려오지 않고도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심리상담의 목적입니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심리상담사는 내담자가 '나의 감정은 것'이라는 걸 이해할 있도록 천천히 다가갑니다.


저 안하무인이고 못된, 혹은 나쁜 의도는 없었겠지만 나를 아프게 한 사람 때문에 내가 감정적으로 상처 입었다는 것이 우리가 처음 갖게 되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이제 개인주의 사회에서 살아갑니다. 개인이 스스로의 삶에 관한 의사결정을 내리고, 집단의 목표를 위해 개인이 희생되는 게 아닌, 개인의 욕구를 이루기 위해 집단에 소속되고자 합니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을 옹호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태어난 사람들임을 고려하지 않고 개인에게 주어진 열린 가능성의 부담감과 선택의 무게만을 강조하는 것은 우울증, 완벽주의, 비교와 경쟁, 타인에 대한 비공감적 태도 등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니까요.




오직 나만이 내 마음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


하지만 마음을 공부하며 감정에서 만큼은 조금 더 개인주의적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습니다. 내 감정이 타인의 잘못 때문이 아니고, 내 감정은 오롯이 내 것이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 진정한 성장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자존감'이라는 단어의 창시자인 너세니얼 브랜든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아무도 나를 구원하러 와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비정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꼭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친절한 말을 듣고, 다정함을 기대하고, 공감과 이해를 바라기 이전에, 사실 정말로 그러한 것들이 채워지는 곳은 내가 나를 대하는 태도 속이라는 것을요. 내가 나 자신을 인정하고, 다정하게 대하며, 공감하고, 깊이 이해한다면, 타인은 더 이상 당신에게 상처를 입힐 수 없습니다.


누군가 모욕적인 말을 했을 때, 우리는 그 모욕적인 말을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모욕을 들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판단할 수 없죠. 




상처는 타인이 얼마나 잘못된 사람인지를 증명하고 싶어 하지만, 

사실은 '내가 어떠한 사람인지'가 흔들리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는 건, '상대방이 어떠한 사람인가' 대신에 '나는 누구인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 상처가 내 자아상을 흔들 수 있는 힘이 생기는 이유는, 사실은 내가 이전에 그러한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내가 전혀 믿지 않는 이야기로는 상처를 입을 수 없습니다. 자신이 정말로 정직하다고 믿는 사람에게 '거짓말쟁이'라고 말하는 건 상처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정말 상처가 되는 이유는, 나는 정직한 사람이라고 타인에게서 증명받고 싶은 마음이 있고, 정직해 보이려고 애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내가 나 자신의 정직성을 믿어주지 않았기에, 타인으로부터 확인을 받고 싶었기에, 그 말은 상처가 됩니다.


다만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어린 시절을 통해 성장합니다. 그래서 심리학자 아들러는 열등감을 특정한 사람만 겪는 게 아닌 보편적이고 정상적인 것이라고 하죠. 그래서 우리는 누구나 열등감을 느끼는 취약한 부분이 있고, 상처 입기 쉬운 주제가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 상처는 나에게 몰랐던 영역을 발견하게 해 주고,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게끔 도와주는 이정표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 그만한 깊이의 상처를 나에게 줄 수 있는 이유는, 그가 나와 닮은 모양의 열등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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