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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영 Sep 15. 2023

영겁의 후회와 찬란한 영광 사이

후회와 발전에 관한 에세이


 가을볕에 엉겨 붙은 감정이 마음에 와닿는 때, 사람들은 불현듯 옛 생각에 잠겨 들었다. 말려 올라간 입꼬리를 본 이가 다가와 "무슨 좋은 일이 있느냐"라고 상냥하게 물었다. 글쎄, 머릿속에 비단처럼 펼쳐지는 고운 나날들을 어찌 한 단어로 정리할 수 있을까.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어 "아무 일도 아니다"라고 얼버무리고 말았다.

 창밖에 쏴-아 하고 소나기가 쏟아졌다. 비가 연거푸 쏟아질수록, 계절은 점점 더 여물어갔다. 파릇파릇했던 여름날의 생기는 날씨의 변화에 노랗게 익어가는 중이었고, 사람들은 또 한 해가 가는 중이라고 탄식을 쏟아냈다.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에는 안타까워하면서, 눈앞에 펼쳐진 자연의 색채는 감상할 줄 몰랐다. 어쨌든 다음 해가 오면 또다시 마주할 것들이라서 그런가.

 그런 사람들도 연말과 새해의 사이에서는 엄살을 피울 것이고, 또 그 해에 익숙해질 테다. 후회하는 이도 있고, 만족해하는 이도 있고, 여러 단편적인 얼굴들이 모여 연말을 보내게 될 것이다. 늘 반복되는 1년이지만, 이상하게도 다가올 내일이 익숙지 않았다. 역경과 고난을 마주할 때마다 새로운 감정이 들었다. 마치 험난한 세상밖으로 튀어나와 본 적 없는 말랑한 생명체처럼.

 오랜만에 동생과 통화를 했다. 가벼운 안부부터 시작해, 그동안 뭘 하고 지내는지 일상이야기를 주로 했다. 나는 늘 그랬듯 퇴근하고 나서 운동이나 자기 계발 같은 걸 한다고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요즘 목표 없이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며 표류하는 지금이 좋았다. 동생도 한때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 있어 이것저것 도전해 본 적이 있었기에, 나는 더 신나게 요즘 나의 일상을 늘어놓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생의 일상은 나와는 전혀 반대였다. 한참 웃으며 통화하던 동생이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 그때 내 상황이 여의치 못했잖아. 그때 그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내 인생이 조금 더 달라져 있었을 텐데. 그 사람들을 보면 천불이 나서 더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

 나는 동생이 무심코 뱉은 푸념을 듣던 나는, 쓴소리를 뱉었다.

 "남탓하지 마. 넌 지금도 무언갈 꾸준히 하지 못하는데,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서 더 나아질 것 같아?"


사람들은 두려움을 집어먹다 보면 자신의 게으름을 정당화했다. 자의에 의한 것이든, 타의에 의한 것이든 원망의 대상을 찾아 끊임없이 미워했다. 누군가를 평생 탓하면서 후회 속에 자신의 생을 낭비하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생을 진취적으로 살지 못한 채 과거의 영광 속에만 갇혀 살게 됐다. 그런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발전적이지 못하고, 옛이야기만 줄줄 늘어놓았다. 그때가 자신이 살았던 인생 중에 가장 빛이 난 시기라고 생각해서일 테다.

 나는 동생과 대화하면서, 남 탓을 하는 동생이 실망스러우면서도 한 편으론 안타까웠다. 어쨌든 생이라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단 한 번의 찬스다. 밑그림이 없는 도화지이기 때문에 어떻게 그려도 내 마음대로 그릴 수 있었다. 이제 거의 20대인 동생의 푸념은, 마치 80대의 노인의 후회처럼 느껴졌다. 적어도 20대는 뭔가를 해도 할 수 있는 나이 아닌가.

 나는 나의 지난 20대를 후회하지 않는다. 방법을 몰라 무식하게 살았지만, 그때 그 시절 나의 무지를 인정한다. 그렇다고 그 시절을 헛된 시간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그 시절의 감정과 생각들을 가지런히 정리해 책 한 권을 써냈고, 나는 내 인생에서 또 다른 필모그래피를 쌓아왔다. 없는 환경에서도 끊임없이 노력했다. 인생에는 길도 없고, 이정표도 없으니, 내가 어떻게 굴러가든 내 삶은 시간 위에 기록되었다. 중요한 것은 먼 목표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오늘 당장 내가 무엇을 하는가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이 나이 들어감은 계절의 변화에 실감하면서도, 현재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해보지 못하는 듯했다.

 "세상엔 자신이 좋아하는 목표나 꿈이 있어서 달려가는 사람도 있지만,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몰라 오랫동안 찾아다니는 사람도 있어. 좋아하는 게 있다는 건, 이제 시작점에서 달려 나가기만 하면 된다는 뜻이야. 상황 탓, 남 탓, 자신탓 하면서 아무것도 안 하는 건 그저 네 인생을 낭비하는 것뿐이야."

 누군가 나에게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힘들어할 때, 나는 주로 위로를 해주는 편이었다. 하지만 동생의 푸념에는 차마 위로나 동조를 할 수 없었다.

 어쨌든 인생은 각자의 시간이기 때문에, 타인이 이렇다 저렇다 잔소리를 늘어놓은들, 자기 자신이 뼈저리게 깨닫지 못하면 바뀌지 않는다. 그러니 동생에게 나의 목소리는 그저 바람결에 흩어지는 계절일지도 모른다.

 "맞아. 열심히 살아야지."

 동생의 대답이 단지 이 순간을 모면하기 위한 위한 회피성 대답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누나인 나에게 긍정적인 모습으로 비치는 것이 아닌, 진심으로 자신의 마음에 촛불을 켰는가가 중요했다. 원망할 대상을 찾아 자신의 인생을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닌, 스스로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찾아 나서기를 바란다. 인생을 남탓하는 시간으로 보낸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사계절은 반복된다. 날씨에 따라 다르겠지만, 비슷한 흐름으로 내년에 또 한 번 같은 계절을 마주하게 될 테다. 언젠가, 어떤 과거의 기억이 계절의 바람결에 흘러온다면, 그때 나는 어떤 형태로 웃을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 '그때 참 좋았지'로 시작해서 영겁의 후회 속에 갇힐 것인지, 찬란한 영광으로 스쳐 지나갈 것인지는 오늘 내가 어떤 시간을 보내느냐에 따라 달랐다. 누구나 옛일을 회상하며 웃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미소가 원망이 아닌 밝은 진심이기를 바라며, 이 짧은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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