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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영 Oct 11. 2023

낡은 서랍


 한적한 바람에 눈물 흘릴 일 없는, 풍요로운 계절. 어떤 계절도 이처럼 처연할 수 없었다. 여름 내 생기를 잃지 않던 푸른 기운은, 녹진한 가을볕 아래 농익어가기 시작했다. 그 붉은 입술들은 서늘해진 바람에 하나 둘 꺾였다. 계절이 겨울을 향해 달려갈수록, 가을은 생기를 잃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가을을 무척 사랑했다. 시들어가는 계절에도 부지런히 사랑을 했다.

 보내지 못한 편지가 있다. 시 한 편에 실어 보낸 편지에는 재회를 희망하는 꿈이 담겨 있었다. 내년 가을이 오면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한껏 적었다. 그러나 먼저 보내온 답시에는 재회 대신 영원한 이별이 담겨 있었다. 가을은 다시 오지만, 오늘날 가을은 또다시 없을 테니까. 마치, 사랑이 다 같은 사랑이 아니듯 말이다. 그 편지에는 온갖 슬픔과 애절함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이 사랑이 끝사랑인 것처럼 굴었고, 필체에 담긴 감정에서 눈물 냄새가 났다. 

 책장에는 쓰다 만 일기장들이 쌓여 있었다. 끝장을 다 채우지도 못한 수많은 공책들이. 왜 감정은 한결같지 않고 들쭉날쭉할까? 어느 날 갑자기 우울해진 감정은, 연필 끝을 따라 공책에 새겨졌다. 그저 알량하기만 한 감정의 단어들이 공책에서 울고 있었다. 이미 시간이 지나버린 감정은 잊히기 마련이었다. 시간만 속절없이 흘러가길 바라며 기다렸던 마음이 차분해지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지난 감정의 기록을 보더라도 그때만큼 마음이 푸르게 물들지는 않았다. 당시의 마음을 떠올리며 오늘날의 내가 과거의 나를 위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동안, 나는 부지런히 익어갔다. 어떤 날은 상처를 받았다고도 하고, 또 어떤 날은 어리광을 부린다고도 했지만, 그 시간들은 분명 성숙해져 가는 순간이었다. 누군가는 익어가는 나를 한 입 베어 물고 싶어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수많은 세월을 알았다. 새로운 사랑이 재밌지 않았다.

 서랍 속에 간직한 수많은 설렘 중, 지금의 나를 안착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새로운 것은 늘 탐스러웠지만, 이제는 그 설렘의 맛을 알고 있었다. 이제 나는 편안하게 삶을 누리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따스한 가을볕을 온전히 느끼는 지금이 계절처럼 말이다. 세월이 흘러 겨울이 다가옴에 탄식하는 것이 아닌, 지금 이 순간의 가을을 만끽하는 것. 지금 내가 서랍을 들여다보며 느끼는 이런저런 감정들.

 여름의 생기를 갈망했던 순간이 있었고, 그 생기를 영원히 잃고 싶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 청춘의 아름다운 열정 같은 것, 젊음의 눈물 같은 것들. 그래서 겨울 사이에 낀 가을을 싫어했는지도 모른다. 에둘러 여름이 좋다고 말하던 날들도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영원히 늙고 싶지 않은, 청춘에만 머물러 있고 싶은 욕심 같은 것이었겠다.

 이제는 영원히 젊지 않아도 된다.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인생이라도 괜찮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고, 추한 늙음도 없으니까. 오직 성숙해진 내 인생의 가을을, 내 나이에서 마음껏 향유하리라. 언젠가 내 인생에 겨울을 맞는 날, 내 삶의 사계를 다 경험하고 세상과 이별하는 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후회 없이 생을 누렸노라고 말할 수 있도록, 나의 남은 계절을 행복하게 살아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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