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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플레 Aug 07. 2022

주간 영화

2022.07.30-2022.08.05

<비상선언> (한재림, 2022)


<비상선언>은 비행기에 승객이 타고 있지 않을 때에도 끊임없이 흔들리는 핸드헬드 화면을 통해 관객과 만나려고 한다. 게다가 <비상선언>의 카메라는 소수의 구간을 제외하면 공항이든 항공기 내부든 장소를 가리지 않고 줄곧 눈높이 위치와 비슷하거나 살짝 높은 각도의 시점에 의지하는 것 같다. 얼마간 떨어진 거리에서 망원렌즈로 피사체를 염탐/관찰하는 듯한 시선 또한 영화에서 줄곧 나타났던 것 같다. 여기까지만 보면 <비상선언>의 프레임을 구성하는 문법은 생생한 공간감과 상황에 깃든 불안감을 만들어내면서 관객 각자의 심리를 자극하기 위해 도입된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비상선언>을 관객의 내면을 자극하는 '체험'의 영화라고 단언할 수 있는가?


이 지점에서 영화가 굳이 선택한 영상통화 시퀀스를 떠올려보고 싶다. '남겨진 자들과 떠난 자'들의 절절한 사연들... 이때 중요한 점이 있다면, 관객이 영상통화를 하고 있는 가족들의 모습을 제3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비상선언>은 이 구간에서 제3자의 시선이 아닌 1인칭 시점을 빌려 보도록 관객들을 유도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따라와야 하는 질문이 있다. <비상선언>을 보는 관객은 과연 '관객의 자리'를 벗어날 수 있는가? 어째서 <비상선언>은 우리를 영화 속 남겨진 가족들의 위치로 데려다 놓으려고 하는 것인가?


현실의 관객을 영화로 불러들이는 작업에 있어 <비상선언>은 기묘한 인상을 남긴다. 영화 속 세계가 실제 관객들의 세계와 얼마나 호응할 수 있는지를 따져봤을 때, 비행기 내부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모습은 최근 대한민국 역사에 있어 중요한 몇몇 재난 상황 혹은 참사들을 떠올리게 한다. 게다가 뻔한 언급이겠지만 코로나19 팬데믹을 지나온 인류사의 한 페이지 또한 영화의 시의성을 강화해 주는 계기로 작용한다. 이렇듯 의도적으로 현실의 거울로 설계된 듯한 <비상선언>이 결정적인 순간에 던지는 쟁점이 있다. 영화는 '공익을 위한 희생 혹은 결단'이 유효한 담론인지를 굉장히 직설적이고 투박한 화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다시 영상통화 시퀀스를 떠올린다. 선체 내부의 생존자들이 뜻을 모았고, 남겨진 가족들의 자리로 떠밀린 관객은 고민에 빠져야만 한다. 나는 어떤 편에서 시위를 하고 어떤 편에서 댓글을 달고 어떤 편에서 투표를 했는가/하는가/할 것인가?



<카터> (정병길, 2022)


<카터>는 편집점과 CG나 드론 촬영 등을 적극 동원해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지는 롱테이크를 고수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원테이크(처럼 보이게 하는 것)가 <카터>에서 과연 꼭 필요한 것이었을까? 이상한 점은 <카터>가 카터의 1인칭을 대리하는 듯한 시점 대신 사건과 현장을 상공에서 조명하는 드론캠 촬영에 크게 의지한다는 점이다. 직부감으로 요원들이 탑승한 버스를 담아내면서 시작하는 <카터>는 오로지 원테이크를 어떻게 하면 잘 이어나갈지에 대한 관심만 있지, 캐릭터의 외·내적 상황에 몰입하도록 하는 장치엔 관심이 없다. 그래서 관객은 이 영화를 통해 VR 기기를 이용하듯 카터의 1인칭 시점에 몰입하는 기회를 부여받을 수 없다. 다시 말해 관객은 <카터>에서 <하드코어 헨리>의 거의 모든 장면, 그리고 그를 오마주했던 감독의 전작 <악녀>의 도입부 액션 시퀀스에서처럼 영화 속 인물의 시점을 빌릴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카터>의 무대는 절대자의 시점으로 구석구석 들여다보는 일종의 가상 세계로 작동하게 되는 셈이다. 여기에 더해 조악한 CG와 어긋나는 물리 법칙이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서 있는 모습을 보면, 흡사 <카터>는 게임이 발매될 때마다 나오는 시네마틱 트레일러 영상을 두 시간으로 길게 늘려버린 버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카터>는 무엇이 되려고 하는 걸까. 게임 같은 영화 혹은 영화 같은 게임, 그 경계를 논하는 야심작이 될 수 있을까? <카터>에 들러붙은 이런 연출과 이런 시도를 과연 매체 간의 상호작용으로 바라볼 수 있는 걸까? 이 지점에서 나는 <카터>가 지극히 피상적으로 화두를 끌어오는 데에만 겨우 성공할 뿐 그 이상 해내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느낀다. 영화가 게임이 될 필요도 없고, 영화가 굳이 매체 담론을 끌어오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카터>는 자신이 선택한 형식의 당위를 최소한으로도 납득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빈곤한 텍스트가 되어 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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