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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플레 Aug 15. 2022

주간 영화

2022.08.06-2022.08.12

<멍하고 혼돈스러운(Dazed & Confused)> (리처드 링클레이터, 1993)


영화는 인물들의 에필로그나 사연들에 머무르려고 하거나, 그들의 타임라인을 상세히 제시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제시되는 건 순서를 뒤바꿔도 문제가 없을 것만 같은 찰나다. 삼삼오오 모인 각자의 시공간을 교차하다 보면 과연 남는 게 무엇일까.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시간을 흘려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를 몸소 깨닫는 과정이다. 그러니까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스몰 토크, 대화를 감싸는 몽롱한 약기운, 남의 차를 빌려 타고 정처 없이 떠도는 학생들. <멍하고 혼돈스러운>에서 관객들은 인물들 각자의 내밀한 사연 대신 흔들리는 초상 그 자체를 목격하게 되는 셈인데, 이로 인해 영화는 서사에 속박되지 않을 수 있다. 약에 취해 있는 슬레이터가 조지 워싱턴에 대해 아무 말 대잔치를 벌이는 장면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하지만 <멍하고 혼돈스러운>에선 그 신이 꼭 필요하다. 다시는 오지 않을 순간들을 그 자체로 긍정하려는 어떤 집념을 붙들고 싶어 하는 영화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한 영화의 바람은 곧 영화가 추구하는 낭만과 맞닿을 수 있는 것 같다. 이곳에서 낭만은 그때 그 시절이 좋았지, 따위의 단편적인 감정들이 아니다. <멍하고 혼돈스러운>의 엔딩 숏을 떠올린다. 자동차는 굴러가고, 그들은 여전히 길 위에 있고, 카메라는 길 위만을 비추고 있다. 정박할 수 없는 상태, 선뜻 멈추기에도 애매모호하니까 그냥 엑셀을 밟고 보자는 이 충동 어린 결정들. <멍하고 혼돈스러운>은 그 상태를 붙잡고 싶어는 하지만, 그 상태에 대한 가치 판단을 내리지는 않는다. 그래서 영화는 종착지를 설정하지 못한 채 끝나야만 한다.



<헌트> (이정재, 2022)


아웅산 묘소 테러가 일어났던 1983년이 영화의 주 무대다. 그런데 영화는 그날의 진실 추적이나 현실의 재현 등에 힘을 쏟지 않는다. 1980년 광주를 극으로 불러들이는 모습이나 인물의 몇몇 대사, 독재자 대통령 등이 묘사되는 순간들만 보더라도 분명 현실 요소를 극에 녹여내고 있지만, 오히려 많은 부분에서 적절한 각색과 비워두는 전략을 통해 실존 인물들의 흔적이 아닌 극 중 인물들의 상황에 집중하게 만든다는 점이 <헌트>의 구멍을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헌트>는 곳곳에 뚫린 이야기의 여백을 무엇으로 채워 넣고 있는가?


잊을 만 하면 펼쳐지는 수많은 액션 신을 예로 들 수 있겠다. 극 전개의 리듬이 몇몇 결정적인 장면에서 선보이는 액션들에 의해 좌지우지되기도 한다. 이때 ‘헌트’가 주요한 액션 신들을 인물들의 처지를 강조하는 데에도 활용하고, 그 자체로 전개에 빠져서는 안 될 요소로 녹여내기도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거리를 두면서 서로를 견제하던 박평호와 김정도가 계단을 굴러 내려오며 뒤엉켜 맨몸 액션을 벌이는 장면에 이르면, 서로의 육체가 충돌하는 그 시점부터 두 사람을 둘러싼 갈등 양상이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한다. 후반부의 결정적인 건물 폭발 신에서 두 사람은 각종 파편과 회색빛 먼지와 재에 뒤덮여 서로 분간이 안 가는 형상이 된 채 만나게 된다. <헌트>의 액션이 배치된 곳에선 늘 인물 간의 관계를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어쩌면 <헌트>는 움직임으로 인물들을 표현하고, 몸짓으로 시대의 여백을 채운 ‘행위’의 영화가 아닐까.




<미션 임파서블: 고스트 프로토콜(Mission: Impossible - Ghost Protocol)> (브래드 버드, 2011)


<미션 임파서블 4>의 표면에는 핵탄두를 둘러싼 미-러 갈등이 자리하지만, 속살을 벗겨낼수록 불확실한 개인의 믿음을 시험하는 순간들이 곳곳에 서려 있다. 그래서 문득 에단 헌트의 팀이 이용하던 주파수에 끼어들어 솜씨 좋게 분탕질을 선사하는 코발트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곳에서 인물들은 믿음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이고 있는가? 사실 첩보 장르물에서 '믿음'은 그것이 부정될 때 가치가 급등한다. 믿지 않고 의심의 씨앗을 심어놓아야만 사건이 추가되고, 서사가 전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션 4>에서 믿음은 오히려 믿음으로 존재해야만 한다. 어쩌면 헌트가 두바이 부르즈 칼리파에 매달릴 수 있던 이유도, 브랜트가 자력만 믿고 몸을 던질 수 있던 이유도, 헌트가 그의 팀과 코발트의 계획을 막을 수 있던 이유도, 무엇을 믿느냐보다 믿음 그 자체 그러니까 믿어야 하는 상황을 수용하고 긍정할 수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는지 생각해 본다.


부르즈 칼리파의 유리벽을 기어 올라가는 에단 헌트, 아니 톰 크루즈의 몸에는 수많은 지지용 케이블이 달려 있었고, 실제 촬영은 (여전히 위험하지만) 비교적 안전한 상황에서 진행됐다. 그렇다면 본편에서 케이블이 지워졌을 때, 영화는 과연 거짓을 말하고 있는 걸까? 어쩌면 <미션 4>에서 에단 헌트가 건물을 올라가는 그 신은 난감한 질문을 만들어낸다. 톰 크루즈가 실제로 위험한 스턴트를 소화했다는 사실을 믿는 것(촬영 비화를 알기 전까지 관객은 이게 CG 인지 실제 스턴트인지 분간할 수 없다)과, 에단 헌트가 고층 빌딩을 올라 미션을 완수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은 각각 어떤 점에서 다른 걸까? 어느 쪽이든, '카메라에 찍힌 남자의 위험천만한 행위 자체에 대한 믿음'이라는 점이 똑같다. 그래서 <미션 4>의 동력은 진실과 거짓의 가치 판단을 섬세하게 설정하는 데 있지 않다. 불확실하든 확실하든, 무언가를 믿기로 하는 것. 바로 이러한 태도가 <미션 3>에서 <미션 4>로 넘어오면서 시리즈의 분기점으로 작용하는 데 크게 기여한 셈이다. 믿음 그 자체로 인해 인과가 형성된다는 점이 본편의 기이한 매력이 아닐지. 믿지 않으면, 에단 헌트는 미션 완수를 외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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