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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플레 Sep 10. 2022

주간 영화

2022.08.20-2022.08.26

<미션 임파서블: 폴아웃(Mission: Impossible - Fallout)> (크리스토퍼 맥쿼리, 2018)


시리즈의 체질 개선이라는 명목으로 4편부터 양적, 질적 성장을 도모한 <미션 임파서블> 프랜차이즈 세 편의 느슨한 틀 속에서 6편은 어딘가 이질감을 풍기고 있다. 유독 <폴아웃>은 비장미와 진지함을 잃어버리려고 하지 않는다. 유머는 사라졌고, 인물들은 궁지에 몰리고, 절체절명의 순간에 에단 헌트는 또다시 계획과 구상 대신 본능과 행동에 모든 걸 내걸고 있다. 이때 헌트가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아보려 하고, 미약한 가능성이라도 보이면 일단 내지르고, 막무가내로 고집 피우던 모습들은 지난 영화들에서도 줄곧 반복돼 왔던 모습이지만, 이러한 그의 시그니처가 <폴아웃>에선 조금 독특한 지위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에단 헌트가 아닌 톰 크루즈의 시그니처로 변질되어 버린 게 아닐지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에단 헌트는 언제든 속임수와 변장 없이 자신의 모습을 노출하고 육체를 현현한다. 첩보 환경에서 뛰어난 스파이는 교란과 거짓에 능통해야 하지만, 에단 헌트 아니 톰 크루즈는 그런 것들과는 거리가 멀다. 존 라크로 변장하지 못해 되는대로 맨얼굴을 내보이는 패기, 다리를 다쳐 절뚝여도 적재적소에 맞춰 자신의 위치를 알리려는 의지 같은 것들이 시리즈를 버텨낸 톰 크루즈를 감싸 안고 있다. <폴아웃>은 그래서 영화조차도 에단 헌트를 톰 크루즈와 분간할 수 없다고 선언해 버리는 어떤 단초 혹은 시발점이다. <로그네이션>에서 전조를 보였지만, <폴아웃>은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그런 존재론의 화두를 내세운다.


그 화두는 곧 에단 헌트에게 찾아오는 혹은 그가 직면하는 환상, 꿈 등 비현실의 영역과 맞물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폴아웃>은 에단 헌트의 꿈으로 포문을 연다. 이때 줄리아를 바라보는 에단 헌트의 모습은, 시리즈 3, 4편에 이어 세월의 무게를 견뎌낸 톰 크루즈와 미셸 모나한 사이에서 발생하는 기류가 없이는 완성될 수 없다. 따라서 에단 헌트와 톰 크루즈의 존재가 어떤 순간에 더 유효한지를 따지기 시작할 때 <폴아웃>이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이 환상을 벗어난 뒤 미션 지령을 받는 에단 헌트의 모습은 시리즈의 클리셰로 반복됐던 그 모습, 우리가 보아 왔던 톰 크루즈의 그 모습과 겹쳐지면서 관객들에게 하나의 통과 의례처럼 작동하는 셈이다. 이쯤 되면 '이번엔 IMF가 어떻게 신원을 확인한 뒤 과연 어떤 방식으로 메시지가 폭파될까?'라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는데, 이건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가 에단 헌트의 영화로만 존립할 수 없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톰 크루즈가 관객들에게 각인시켜 온 면모가 관객 각자의 인식 체계 어딘가에 잔존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폴아웃>에는 특이한 구간이 있다. 발생 가능한 하나의 미래 가운데 경우의 수를 콕 집어 플래시 포워드처럼 펼쳐 놓는다. 에단 헌트가 지닌 살생에 관한 가치관에 대해 관객들이 엿볼 기회를 얻는 셈이다. 실제로 영화가 진행되고 나면 관객들 중 일부는 아까 봤던 시퀀스가 분명히 예정된 미래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헌트의 허무맹랑한 상상이라기엔 또 구체적인 개연성을 갖춘 듯 보인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무엇이 됐든 관객이 그 장면을 시간의 흐름 속 사건 간 인과 관계의 맥락으로 읽어내는 대신, 인물의 내면 혹은 가치관에 맞닿은 지점으로 인식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우리가 그 인물의 서사에 집중하게 될 때, 가장 중요한 건 존재성을 따지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에단 헌트가 영화 속 온전한 헌트로 존립할 수 있는지, 혹은 톰 크루즈가 영화 바깥의 배우로서만 온전하게 존재할 수 있는지 말이다. 시리즈를 거쳐온 에단 헌트의 서사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 우리는 '그'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007 퀀텀 오브 솔러스(Quantum of Solace)>(마크 포스터, 2008)


본드의 혼란스러운 내면을 반영한 건지, 각각의 숏은 너무나도 짧은 시간을 할당받았고, 숏을 이어 붙이는 편집의 템포 역시 너무나도 들쭉날쭉하다. 물론 제작 환경의 비화가 있다지만, <퀀텀>은 그 자체로 너무나도 불균질한 집합체다. 본편에서 선보이는 과격한 액션 장면을 떠올린다. 결과론적이지만 본드가 손대는 사람은 모두 끔찍한 최후를 맞고, 본드가 가는 곳마다 걷잡을 수 없는 소란이 벌어진다.


<퀀텀>은 <본 슈프리머시>처럼 개인의 내면 서사에 충실하려고 하지만, 내면을 직접 표상하기보다는 과격한 몸의 언어가 오히려 텅 비어 버린 내면을 형상화할 수 있다고 믿는 영화 같다. 맨몸 액션, 육해공 추격신, 종류를 가리지 않는 무술의 향연...시리즈 특유의 클리셰 역시 안중에도 없다는 듯 마티니 대신 종류도 모르는 술을 벌컥 벌컥 들이키는 본드의 모습에선, 제이슨 본뿐만 아니라 다니엘 크레이그까지 겹쳐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퀀텀>은 일종의 실험장이다. 다니엘 크레이그와 본드의 유대 관계가 톰 크루즈와 헌트 사이의 그것과 어느 정도 선에서 견줄 수 있는지를 파악하는 무대처럼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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