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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플레 Sep 13. 2022

주간 영화

2022.08.27-2022.09.02

<엑스 마키나(Ex Machina)> (알렉스 가랜드, 2015)


<엑스 마키나>는 '어째서' 인간이 인공지능 구현에 힘을 기울이는지 조명하지 않는다. 대신 인공지능이 어떻게 인간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지를 들여다보는 작업에 몰두한다. 그렇다면 이제 네이든의 거듭된 실험과 연구를 떠올려 본다. 그는 왜 세상과 스스로를 격리시킨 뒤 완벽한 인공지능 구현에 목매고 있는가? 이유는 알 수 없다. 이때 그 이유쯤이야 영화를 접하는 대부분의 관객이 알고 있을 거라며 지레짐작 뭉개버리는 영화의 태도가 유독 거슬린다. 그러니까 <엑스 마키나>는 현실 속 관객들에게 상당 부분 빚을 지고 있는 셈인데, 다시 말해 선행된 이해─자신과 닮은 피조물을 어떻게든 만들어 내길 원하는 인류의 원초적인 욕망 따위에 관한─를 전제로 자연스럽게 깔아 놓았기 때문이다. 영화가 성립되려면, 관객들의 지각 체계가 이 같은 일정한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는 점이 <엑스 마키나>를 독특한 지위로 이끌고 있다.


그래서 관객은 이 영화를 접할 때 (앞서 언급했던) 일종의 관습 혹은 편견을 반드시 작동한 채로 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화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인간이 인공지능을 테스트하는 과정을 세션 별로 나눠 제시하는 <엑스 마키나>에서 관객은 관습 하에 놓인(인간이 결국 인공지능을 구현했는지의 여부를 가려야 하는) 종착지를 향해 가는 에이바의 여정에서 갈피를 잡을 기준점을 놓쳐버리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가 짜인 구조 자체가, 인간의 기준과 관점에서 살펴보는 '에이바의 성장 프로젝트'라는 점을 전제로 하면서도 동시에 '에이바의 입장에서 써 내려가는 탈출기'를 겹쳐놓았기 때문이다. 이때 후자 역시 전자처럼 에이바의 내면을 서술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그의 명분과 동기 따위는 제시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에이바의 탈출기 역시 관객 각자의 관습 체계(인공지능이 자의식을 키워나간 뒤 인간과 유사한 본능에 따라 탈출할 것이라는 예측 따위의 것)를 작동시킨 뒤따라가야 하는 셈이다. 이 지점에서 관객은 불일치를 경험한다. 인간의 서사에 인간이 접속하는 경우와 인공지능-기계 결합체의 서사에 인간이 접속하는 경우는 분명히 다르다.


사실 우리가 네이든과 케일럽을 따라가는 데 있어 염두에 둬야 하는 사항은 그러게 많지는 않다. 이 사람들이 어떻게 대처하고 생각하는지를 따져보기 시작할 때, 과정을 토대로 소거된 맥락을 찾아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에이바를 비롯한 쿄코 등에 가까워지려고 하는 작업은 순탄할 수 없다. 우리는 에이바의 의중을 어느 정도 알아차리는 것 같다고 여기면서도, 어느 구간을 지나거나 어떤 지점에서는 에이바를 따라잡지 못했노라고 선언할 수 있다. 영화에 제시되는 인공지능의 서사를 받아들이거나 이해하는 데 있어 우리의 관습적인 판단과 지식 배경을 동원하는 일은 그다지 쓸모가 없다. 로봇 공학을 전공했든, 알리시아 비칸데르의 가까운 지인이든, 그 어떤 조건에서든 우리는 불가해함을 해소할 수 없다. 에이바가 마침내 그런 모습을 보여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 모습을 감각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일 뿐, 그를 둘러싼 전후 맥락과 인과 관계를 추출해낼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엑스 마키나>는 대상을 어떻게 감각할 것인지에 관한 화두로 접근해야만 하는 영화처럼 느껴진다.



<서던 리치: 소멸의 땅(Annihilation)> (알렉스 가랜드, 2018)


알렉스 가랜드는 자꾸만 '왜'보다는 '어떻게'를 점검하려고 드는 것 같다. 두 달 전 <멘>을 접한 뒤, <엑스 마키나>를 경유해 본편에 도달하면서 들었던 생각이다. 단순히 인간 혐오라기엔, 인간을 탐구 대상으로 두는 듯한 감독의 세계가 엿보인다.


전지구적 위기 상황을 설정한 뒤 개인의 내면을 건드리는 서사를 포개어 놓는 이유가 있을까. 어쩌면 간단할지도 모르겠다.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변태적으로 정교하게 실험 조건을 설계하듯, 가랜드 역시 자신만의 실험장을 마련해놓은 셈이다. 보다 노골적으로 그 욕망을 투사한 영화가 <소멸>인 것처럼 느껴진다. 각종 메타포를 차치하더라도, <소멸>이 드러내고자 하는 바는 굉장히 선명한(?) 편이다. 인물의 뒤틀린 내면과 호응하는 뒤틀린 세상의 전체 혹은 일부. 그러니까 어디까지 변형이라 말할 수 있고 어디까지 치유라 정의내릴 수 있으며, 어디까지 존재(개체의 측면에서)한다고 단언할 수 있는 걸까.


프랙탈 구조로 끊임없이 소멸과 생성을 반복하는 유기체(같은 것)를 응시하는 리나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로부터 복제되는(혹은 복제된 것처럼 보이는) 대상을 두고, 우리는 진위 여부를 어떻게 가려야 하는가. 가랜드는 이 지점에서 자신이 활용하는 카메라와 영화라는 매체의 속성을 자신이 펼쳐놓는 존재론의 화두와 맞닿게 하는 실험장을 구축한다. 영화는 가상에서 실재를, 현실에서 허구를 끄집어 낼 수 있다. 물론 태생적으로 영화는 가상과 재현에 속박되어 있다. 그렇기에, 대상을 감각하거나 존재의 본질 따위를 논하려는 가랜드의 시선이 영화라는 매체와 퍽 잘 어울린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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