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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플레 Oct 11. 2022

주간 영화

2022.09.10-2022.09.23

2022.09.10-2022.09.16




<블레이드 2(Blade 2)> (기예르모 델 토로, 2002)


'영화에 나오던 십자가나 성수는 잊으라'던 전편과 달리, <블레이드 2>는 뱀파이어들의 생활 양식이나 특성, 종족에 내재한 숙명 같은 것들에는 크게 관심이 없어 보인다. 관객은 이미 그들이 햇빛에 노출되거나 은 탄환에 맞으면 소멸할 것을 알고 있다. 갈등의 시발점이 되는 변종의 등장 역시 이미 노출된 뱀파이어의 특성이 통하지 않는 존재로 묘사된다는 점에 주목하자. 즉 <블레이드 2>는 이미 관객들의 지식 체계에 일정량의 빚을 진 채로 시작하는 셈이다. 이때 블레이드가 기존의 장비와 무기들을 십분 활용하지 못한 채 육탄전을 벌이는 장면이라든가, 뱀파이어의 특성을 살릴 이유가 없는 맨몸 액션 신들을 떠올려 본다. 이 구간을 따라가는 데 있어 관객들은 사전 정보나 서사 맥락에 충실하는 대신, 블레이드의 신체가 어떻게 현현하는가에 주목할 기회를 얻는다. 전편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본편에서는 블레이드와 웨슬리 스나입스를 오가는 어떤 존재적인 특성을 탐구할 기회가 주어진다는 말이다.


조명을 등지고 정체불명의 상대와 육탄전을 벌이는 블레이드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웨슬리 스나입스의 육체가 뿜어내는 기운 같은 것들이 와닿는다. 재밌게도 이 장면은 뱀파이어의 약점을 활용한 액션 시퀀스임에도, 액션의 재질 자체는 초자연적 존재들의 싸움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묘한 매력을 뿜어낸다. 이 구간은 그러니까 영화의 내적 세계에 포섭된 설정들이 영화 외부의 법칙 내지는 맥락과 뒤섞인 장면인 셈인데, 이곳에서 블레이드/웨슬리 스나입스는 대역을 쓰지 않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래픽 처리가 된 채로 관객들과 만나는 모습을 통해 다중적인 면모를 품고 있다. <블레이드 2>의 매력은 아마도 이런 묘한 질감에서 비롯될 것이다. 어쩌면 웨슬리 스나입스라는 배우이기에, 이런 접근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걸까? 최근 들어 육체의 가능성을 시험하는 톰 크루즈가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와 <탑건: 매버릭> 등을 계기로 여러 차례 소환되고 있지만, 웨슬리 스나입스 같은 경우는 톰 크루즈와는 살짝 다른 결로 육체의 영화를 만들어내는 데 기여하고 있는 건 아닐지도 모르겠다.




<다크밸리(The Dark Valley)> (안드레아스 프로차스카, 2014)


의문의 한 남자가 외딴 마을로 흘러들어오게 된 경위는 오로지 관객만이 알고 있다. 남자가 묵는 집엔 엄마와 딸이 살고 있는데, 그곳에서 그를 지켜보는 내레이터인 딸 루치 역시 그의 의중을 정확하게는 파악할 수 없다. 그렇다면 <다크 밸리>를 따라가는 관객은 그라이더의 사연에 자연스레 집중하게 되지만, 영화 속 그 누구도 그라이더의 내면에 가까워질 수는 없다. 물론 예외는 있다. 루치의 목소리를 빌려 그라이더의 과거를 플래시백으로 들춰내는 식인데, 이 같은 구간이 설정되어 있어도 여전히 루치는 그라이더가 자신을 왜 도와주는지, 그의 행동의 동기와 명분이 어디에서 오는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채로 그와 작별하게 된다. 그렇게 그라이더는 고립되고, 관객들은 그와 가까워지고자 한다. 하지만 영화 내내 그라이더는 설명하지 않는다. 오로지 응시하거나 움직일 뿐이다. 플래시백이 설명해 주는 그의 과거는 단편적일뿐더러, 그가 겪은 지난날의 인고의 시간을 온전히 전달해 주지도 못하고 대변해 줄 수도 없다. 그렇다면 관객은 그라이더에게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는가. 황량한 설산에 우두커니 서 있는 실루엣,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사연을 짐작할 수 있는 깊은 눈빛 등만이 제시될 뿐이다.



2022.09.17-2022.09.23




<키이우 재판(The Kiev Trial)> (세르히 로즈니차, 2022)


재판이 시작되면, 만행을 저지른 파시스트는 당시 상황을 증언하고, 증인들의 증언이 이어지고, 최종 형이 선고된다. 영화는 각 피고 한 명 한 명의 증언, 그리고 이어지는 증인들의 증언을 별다른 편집과 기교 없이 정공법으로 나열하는 방식을 택한다. 물론 조작은 가해진다. 길어지는 시간만큼이나 긴장감이 느슨해지는 재판장의 분위기를 반영하듯 참석한 배심원이라든가 참관하는 시민들의 반응이 드러나는 숏을 삽입하고 있다.


실제 재판이 벌어졌던 날의 사건 순서가 본편이 설정한 증언 시퀀스의 전개 순서와 일치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특정 논조로 귀결되거나 사안의 경중을 극대화하는 방식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키이우 재판>은 인물들의 사연보다는 상황에 몰입할 수 있도록 정교하게 설계된 듯한 인상을 남긴다. 증인들의 증언 역시 다양한 시공간대의 사건에 따른 각기 다른 사람들의 기억을 토대로 진술된다. 1941년부터 43년까지 순차적으로 제시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키이우 재판>에서 나열되는 증언과 변론은 재판장의 공기 자체에 가까워지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만행의 정도가 더 심해지는 데에 따라 감정적인 동요가 커지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만행을 조명하는 재판장 자체를 현시대 관객들에게 펼쳐내보이는 데에 집중하는 느낌을 받는다.


마지막 교수형의 순간을 담는 것마저도, 단순한 푸티지의 재구성이 아닌 재판의 일부가 된다. 그렇게 재판장의 공기를 보존하려는 영화는 결국 재판장의 본질에 다가선다. 누구라도 피해 갈 수 없는, 만행에 대한 정당한 응징의 의미 말이다.




<뼈> (신나리, 2022)


영화에선 오랜 기간 죽은 이들의 혼을 기려 온 일본인 사학자의 젊었을 적 추모 장면이 푸티지로 삽입되는데, 영화는 같은 곳에서 여전히 동일 인물이 추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짚어내면서 그 시공간대를 연결하고 있다. 오래전의 영상을 발굴하고 제시하는 방식에 있어, <뼈>는 푸티지를 보는 인물이 현재 점유하는 시공간과 푸티지 속 인물의 시공간을 어떤 방식으로 접합할지에 관해 하나의 방법을 제시하는 것 같다.  연출자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런 감각을 불러일으킨다는 점만으로도 <뼈>는 한국과 일본 사이 깊어진 감정의 골의 일부를 응시하는 작업에 있어 하나의 균열을 낼 수 있는 작은 움직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영화는 내내 존재이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관해 다루고 있다. 희생자들은 존재하지만, 그들의 흔적은 어디에 있고 그들을 누가 기억하고 있는가. 그런 의미에서 본편의 제목은 의미심장하다. 물리적으로 실감 가능한 차원에서 보면, 제목인 '뼈'는 순수한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영화에 뼈가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제 징용 희생자들의 '뼈'를 찾아 나서는 태도가 돋보이게 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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