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리와 로키타>를 포함한 다르덴 형제의 주요 연출작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물과 세계를 정의하는 좌표의 관점에서 볼 때, 다르덴의 카메라는 경계에 위치한 적이 없다. 형제의 카메라는 언제나 삶의 현장 한가운데에 있었다. 삶을 둘러싼 울타리 내부에서 진행되는 양상을 기꺼이 포착하려는 그들의 카메라는 전지전능한 신이 될 때도 있었지만, 무력한 고발자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셈이다. 그 이유는 세계의 내부에서는 두 가지 선택지만이 존재하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온몸을 둘러싼 세계를 적극 해부하거나, 시시각각 온몸을 훑고 가는 이 세계를 그냥 내버려 둬야 한다. 다르덴의 카메라는 무엇이 되고 싶은 걸까? 과연 그들의 영화에서 카메라의 권한은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 걸까?
그런 의미에서 <토리와 로키타>에서 발생하는 '죽음'의 순간은 '다르덴 월드'의 근간을 뒤흔드는 사건이다. 세계의 한복판에서 드디어 이 세계가 끝났다고 주저 없이 선언하는 영화, 그리고 그 순간을 미동 없이 바라보는 카메라. 죽음을 목도하는 카메라는 왜 하필 '그곳에서' '죽음'을 바라봐야만 했던 걸까.
<언노운 걸>에서 스크린에 끝내 육체를 현시하지 않았던 펠리시 콤바를 떠올린다. 그가 죽는 시점의 순간은 직접 묘사되지 않는다. 그가 죽었다는 (혹은 세상에서 사라졌다는) 몇몇 단서만이 인물들의 말로만 환기된다. <로나의 침묵>에서도 관객은 클로디가 죽는 순간을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다르덴의 극영화에서 인물의 죽음은 처음 다뤄진 순간은 아니다. 형제는 약 30년 전에 <프로메제>의 아미두가 죽어가는 모습, 그리고 마침내 죽음에 다다른 순간을 담아냈기 때문이다. <프로메제>의 죽음은 이고르의 내면과 행위에 큰 영향을 미치는 서사의 동력원이자 극 전체를 지배하는 중심 사건이었다. 하지만 <토리와 로키타>의 죽음은 인과를 설명하는 장치가 아니다. 충격 자체를 위한 충격, 일종의 선언이다. 로키타의 세계는 더는 존속할 수 없다. 그의 세계는 종결됐다.
우리는 <로제타>의 카메라가 꺼져도 로제타를 둘러싼 세계가 지금도 그 어딘가에서 생성되거나 사라지거나 변화를 거듭하면서 전 세계에 퍼진 로제타들의 삶 속 어딘가에 맴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로제타를 따라가던 카메라는 내화면과 외화면의 경계를 불분명하게 매만지면서 영화와 현실 사이 모호한 중간지대를 만들어내는 데 관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본편에선 촬영이 끝나면 총에 맞아 싸늘하게 식어 있던 로키타는 이내 옷에 묻은 흙을 털고 일어나는 음번두 조엘리가 된다. 그렇다면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는 동안의 세계만이 유효한 걸까? 다르덴은 그간 카메라의 안과 밖을 함부로 구분 짓지 않으면서 언제나 영화는 현실과 어떤 방식으로든 연동될 수 있다는 데 대한 가능성을 어떤 방식으로든 표출해왔기에(심지어 <소년 아메드>에서 조차도), <토리와 로키타>는 더욱 당황스럽다.
<토리와 로키타>의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 선정 및 감독 초청에 따라, 그들은 4월 말 내한해 전주에 이어 서울에서 숨 가쁜 GV 일정을 소화한 뒤 출국했다. 나 역시 4월29일과 30일 서울에서 그들을 두 번 만났다. 한 GV에서 그들은 카메라의 위치가 여기에 있어도 되는지 늘 고민한다는 말과 함께 여전히 하고 싶은 말이 많이 남았다고 고백했다. 그들은 소위 말하는 '다르덴 스타일'이 어떤 것인지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토리와 로키타>를 곱씹어 보는 나는 이제 다르덴에게서 다르덴 같은 면모를 찾아내는 건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들은 프레임의 내부와 외부, 촬영장과 촬영장 바깥을 선명하게 구분하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것만 같다. 형제는 이제 강력한 충격파 없이 영화와 현실을 연결할 수 없다고 느낀 걸까?
"유럽의 이민자 문제가 이만큼 심각하다, 이런 일들이 여전히 일어나고 있다, 여전히 사각지대는 없어지지 않았고 우리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토리와 로키타>는 영화의 내부에서 종결 선언을 날린 뒤, 영화와 현실 사이 그 어딘가를 유영하는 중간 지대의 생성을 차단한다. 그를 통해 던진 사회 화두는 충격 요법은 충실히 수행할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의 논의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에 관해선 의문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