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런즈의 출연작을 유심히 살펴볼 때 느껴지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연출자가 롤런즈가 맡은 배역의 캐릭터나 서사를 정교하게 구축하지 않았다는 것. 이에 따라 관객들은 인물 자체에 몰입할 기회를 얻는 대신 롤런즈라는 배우와 소통하게 된다. 결국 그가 출연하는 영화들은 연기의 영역이 아닌, 현실 속 롤런즈의 개인적인 면모들이 어느정도 반영된 세계다.
(중략)
신경쇠약 증상을 지닌 한 가정주부의 삶을 담아낸 ‘영향 아래 있는 여자’나 무대 안팎을 오가는 연극 배우의 고뇌를 조명한 ‘오프닝 나이트’에서 롤런즈가 맡은 인물들도 역시 비슷하다. 서사에는 깊이와 밀도가 없다. 그저 롤런즈에게 의지한 채 영화가 계속되는 것이다. 어쩌면 남편 존은 아내를 믿고 그에게 자유를 부여했을 수도 있다. 옆에서 가장 오랜 시간 함께했던 동반자인 남편은 롤런즈의 연기가 틀에 가둬 두기보다는 느슨하게 풀었을 때 더욱 빛을 발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았을까.
롤런즈는 남편 카사베츠의 카메라에 여러 차례 담겼고 그 속에서 감정과 몸짓을 마음껏 표출했다. 때로는 정적이고 때로는 동적인 움직임에는 삶과 연기를 오갔던, 영화인으로서 그의 일상이 자연스레 스며들어 있다. 결국 우리가 기억해야 할 건 미국 독립영화계를 이끌었던 롤런즈의 필모그래피나 위업 따위가 아니라 스크린 속에서 미세하게 떨리던 그의 눈가주름이나 어디론가 바쁘게 걸어가는 그의 발걸음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