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각

내가 조각되던 순간

by 쁨기

누군가는 곱슬머리를 부러워한다. 신비롭고 자유로워 보인다나.

흥, 바람에 가볍게 흩날리는 아련한 웨이브 머리가 부러운 거겠지.

나의 곱슬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모공에서부터 빙빙 회전하면서 자라는 머리카락이라 전체적으로 부하고 지저분해 보인다. 주기적으로 미용실에서 매직 파마로 펴주지 않으면 해그리드 꼴을 못 면한다.

짧게는 3개월, 길게는 4개월마다 주기적인 매직 파마로 곱슬머리를 숨기고 살아왔다.

세 시간이 넘는 대작업 동안 가만히 앉아 머리에 화학약품 처리하고 헹구어내고 매직기로 펴내는 과정들은 여간 지루한 것이 아니다. 미용사들은 스몰토크를 시도해 주지만 요즘 연예인 이슈, 식사 여부와 같이 가벼운, 절대 깊어질 수 없는 대화를 흩날리듯이 계속 이어나가는 것은 시간 때우기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피곤하게 느껴진다. 따분한 표정으로 책을 읽거나 핸드폰에 몰두하는 것으로서 말을 걸지 말아 달라는 의사를 온몸으로 뿜어내야 한다.


오늘의 나는 3개월 만에 돌아온 이 시간을 견디기 위해 집에서 심사숙고하여 골라온 소설책을 읽을 계획이었다. 새로 방문한 미용실이었는데 원장님이 시술 전 상담 때 과하게 웃거나 사근사근하게 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조용히 책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아 안심이었다.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나이에 긴 머리 옴브레 염색이 잘 어울렸다. 원장님은 손이 빠르고 거침없었는데, 아쉽게도 대화 또한 그러했다.


책의 첫 장을 펴기도 전부터 어떤 내용인지, 책을 자주 읽는지 물었다. 본인은 잡지만 좋아한다는 내용과 함께 요즘 베스트셀러가 뭐냐고 물었다. 나는 어떤 것부터 대답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이 필요할 것 같진 않아서 '머리 할 때만 읽어요.' 하고 대답했다.

이내 원장님은 머리에 약을 바르며 숱이 너무 많아요! 하며 웃었다.

나도 거울을 통해 괜히 송구한 표정을 지으며 '숱이 너무 많죠.'라고 답했다.

'부러워요 저는 숱이 너무 없어서 나중에 나이 들어서 걱정이에요.'라는 말에 '제 머리카락 좀 가져가세요.' 하고 얼른 책을 펼쳐버렸다.

주인공의 세계에 빠져들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마를 건드리고 있는 머리카락이 간지러워 쉽지 않았다. 파마 열처리할 동안 원장님이 잠시 다른 손님에게 옮겨갔을 때 비로소 빠른 전개에 올라탈 수 있었다. 샴푸실로 이동하실게요 하는 소리가 아쉬울 정도였다.


머리를 말린 후 매직기로 머리카락 구역을 나누어 차례로 펴는 과정은 제일 중요하고 오래 걸리는 매직 파마의 하이라이트이다. 미용사와 손님이 꽤 오래도록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뜨거운 매직기가 두피에 닿을 것만 같은 두려움과 갑자기 말을 걸 것만 같은 묘한 긴장감에 책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같은 페이지를 반복해서 읽으려는데 원장님이 이번엔 '곱슬이 심하신 편이네요' 하고 말했다.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니 그녀는 매직기 세 종류를 꺼내어놓고 펴고 있었다. 모발의 손상도와 곱슬 정도에 따라 맞춤 시술을 하는 모습을 보니 책만 읽은 것이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 책을 덮어버렸다.

"네, 장마철 되니까 더 부스스해져서 아침마다 스트레스예요."

"그러시겠어요. 어머니 닮으신 거예요?"


미용 가운을 덮은 채 머리에는 군데군데 집게가 박혀있는 거울 속 내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진이를 떠올렸다.


중학교 1학년 때 만난 같은 반의 진이는 정말이지 심한 곱슬머리였다. 머리카락이 아주 새까맣고 까슬까슬한 데다가 숱까지 많았다. 진이는 두꺼운 갈색 플라스틱 머리띠로 그 묵직한 앞머리를 누르고 다녔다. 한 번 웃음이 터지면 높은 톤으로 염소 울음소리처럼 웃었고, 쉬는 시간엔 손거울을 보며 샤프로 쌍꺼풀 라인을 그리거나 공책에 그림을 그렸다.

나는 다른 친구 두 명과 늘 같이 다녔는데 진이와도 좋은 사이를 유지했다.

수련회 가는 버스를 탈 때나 혹은 두 명씩 하는 수행평가를 할 때는 진이까지 껴서 네 명이 되었다. 우리는 진이를 특별히 끼워준다고 생각했고, 진이는 다른 홀수 그룹을 제치고 특별히 우리와 놀아준다고 생각했다.

진이는 그림을 잘 그려 교내외 미술대회에서 상을 받아왔다. 미술 시간에 진이와 앉으면 내 그림도 조금씩 도와주었다.


그날의 미술수업은 고무판화였다.

음각, 양각 기법을 간단히 배우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하여 칼로 고무판을 긁어낸 후 잉크를 묻혀 종이에 찍어내는 것이 두 시간 동안의 과제였다.

나는 더운데 칼로 힘줘서 고무판을 긁어내는 것도 하기 싫었고, 그리고 싶은 그림도 떠오르지 않아 진이의 작업이나 구경할 목적으로 자리를 바꿔 진이 옆에 앉았다.

진이는 꽃잎이 여러 개 겹쳐져 있는 고난도의 작품을 구상하고 있었다. 밑그림이 세세하고 복잡하여 어디가 잉크에 묻어야 하는 부분인지, 어디를 파야 하는지 감이 안 왔다.

진이는 어젯밤 꿈 얘기, 무서운 얘기 등을 쉬지 않고 하면서도 헷갈리지도 않는지 날카로운 칼로 고무판을 세심하게 파내고 있었다. 여름방학을 일주일 앞두고 있던 여름이라 파낸 고무가 끈끈하게 손에 달라붙었다.

나도 뒤늦게 거북이 등껍질 밑그림을 그려보려고 애를 쓰고 있었는데 옆에서 조잘대던 진이가 갑자기 짧은 비명을 질렀다. 오른손으로 잡은 칼이 고무를 파내다가 그대로 미끄러져서 판이 미끄러지지 않게 판을 잡고 있던 엄지와 검지 사이를 깊게 찌른 것이었다. 뚝뚝 흐르는 피를 대강 휴지로 닦아내고 왼손을 감싸 쥔 진이와 보건실에 달려갔다.

진이는 너무 놀라서였는지 울지 않았다. 오히려 의연하게 상처를 살펴보고 '내 꽃 빨간 잉크로 칠하려던 건 아닌데' 하는 농담도 했다. 다행히 상처가 깊지 않아 밴드로 처치가 가능했다.

교실로 돌아오는 길에 수업 중이라 아무도 없는 복도를 진이와 나는 일부러 천천히 걸었다. 진이는 그림 그리는 직업을 가지게 될 텐데 왼손이라 그나마 다행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떡해. 엄마 속상하시겠다. "

나는 3층에 도착하는 마지막 계단을 오르면서 말했다.

다 올라가 있던 진이는 몸을 완전히 돌려 나를 보고 말했다.


"나 엄마 없어."


그리고 손이 너무 아프다며 울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진이를 안아주었다. 그 해는 무더위가 일찍 찾아온 건지 얼굴이 너무 화끈거렸다.

돌이켜보니 진이는 요리 잘하는 다정한 아빠 얘기를 자주 했고, 나는 우리 엄마가 얼마나 신세대인지 자랑했다. 아빠가 엄마를 어떻게 놀렸는지, 가족 외식은 어디서 했는지 시시콜콜하게 얘기하던 내가 큰 잘못을 한 것 같았다.

우리는 교실이 있는 5층까지의 계단을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미안하다고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그 말이 더 진이를 아프게 할 까봐 '내가 나머지 꽃잎 파줄게' 했다.

진이는 '됐어. 너도 피 볼래?' 라며 웃었다.


그날 이후로 진이와 나는 아빠 얘기를 주로 하게 되었을 뿐, 더 깊어지진 않았다. 이전처럼 우리는 짝수가 필요한 순간에 진이와 함께 했고, 진이도 우리와 기꺼이 놀아주었다.

각자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진이와 우리는 자연스레 멀어졌다. 주기적으로 매직 파마를 할 때면 심한 곱슬머리를 유지하던 진이가 생각나곤 했는데 그마저도 성인이 되면서는 점차 희미해졌다.

옅어지는 진이의 기억과 함께 그 당시의 나를 칼로 고무판을 파내듯 파버렸다.

새로운 사람과 관계를 쌓을 때 주변 환경 정보를 예민하게 기억하며 먼저 묻지 않도록 선명한 양각으로 나를 조각했다.


‘네, 저는 엄마 닮았어요. 동생은 아빠 닮아서 생머리인데…. 부러워요.’ 하고 밝게 대답하자,

원장님은 또 어머 그러시구나. 저는 부모님 두 분 다 숱이 없어서 곱슬이어도 좋으니 숱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하고 빠른 손놀림으로 내 머리에 집게를 꽂았다.

원장님은 마치 준비해 놓은 질문 리스트가 있는 것처럼 능숙하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우리는 서로 이 지역 맛집을 추천해 주고, 어디 필라테스가 좋다더라 등의 정보를 끊임없이 공유하며 매직 파마의 긴 장정을 마쳤다. 곱슬머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거울 속의 나는 생머리를 찰랑거리고 있었다.

공들여주신 시술 덕에 머리가 아주 맘에 든다고 하자, 원장님은 '어머니도 모시고 오시면 잘 봐 드릴게요. '했다.

나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3개월 뒤에 같이 올게요.’ 했다. 집에 오자마자 몰려오는 피곤함을 뒤로한 채 인터넷 예약 리뷰 페이지에 접속하여 글을 남겼다.

매직 맛집. 순수하고 거침없는 시술과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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