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하게 살기로 했다

by 쁨기

나에 대해, 세상에 대해, 주변에 대해 이십 대 내내 겨우 쌓아왔던 확신이 오히려 다시 깨지고 있는 30대 초중반이다.

회사는 비용절감과 과다한 업무 강요로 나를 옥죄어오고, 퇴근 후 텅 빈 집에 어지럽혀져 있는 옷더미들을 보며 이렇게 사는 게 맞나 하는 생각에 하루종일 머리가 어지럽다.

남자친구는 오래 준비한 시험을 떨어졌고, 우리가 함께 하려면 어떤 방법이 맞는 것일지 전혀 모르겠다.

어쩌면 평생 함께 할 수 없는 운명인데 꾸역꾸역 미련하게 붙잡아온 건 아닐까?

주변 친구들의 연이은 결혼과 출산소식 그리고 십 년 넘게 장기연애중인 나에 대한 (이제는) 안타까운 시선에, 나만 제자리걸음인 느낌에, 괜히 연말 모임을 피하고 싶어 진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내가 원하는 삶이 뭘까?

가만있어보자..

그는 계획적이지 않다. 매우 감성적이고 음악을 사랑한다. 추진력이 약하고 준비성은 없지만 아주 다정하고 센스 있다. 모든 귀여운 것들을 애정한다. 상상력이 풍부하고 나를 웃겨준다. 심성이 고우면서도 강단 있다. 내 모든 것을 공감해 주고 내 행동을 예측하고 분석한다.


그렇다면 그와 함께 하는 나는?

그와 있을 때 나는 최대한으로 유치해진다.

가사를 죄다 틀리면서도 아무렇게나 흥얼거리고, 말도 안 되는 반복적인 말장난에도 낄낄댄다.

아무것도 아닌 일상의 일들을 부풀리고 덧붙여서 시트콤처럼 만들어버린다.

유년시절의 기억이 절로 생생하게 반짝인다. 재테크, 투자, 아파트 말고 동화, 내 꿈, 사랑과 같은 주제가 튀어나온다.


오호 다시 깨달았다.


나 이렇게 살고 싶네?


좋은 차, 명품 시계보다 손잡고 산책하면서 같이 웃고 울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나를 유치하게 만들어주는 사람과 함께이고 싶다.


나이를 먹으면서 자연스레 어른이 되어버렸지만.. 나는 꿈 많고 순수하던 어린 시절을 영원히 그리워할 것이다.

이걸 끄집어내 주는 사람이 내겐 정답이다.

살다 보니 나를 어른스럽게 만들어주는 사람은 많았을지 몰라도, 유치하게 만들어주는 사람을 만나기는 어려웠다.

비교와 경쟁이 가득한 사회에서 너무 지쳐버린 나는 더 이상의 동기부여와 성장은 사양한다..

위안과 안정을 택하겠다.

유치하게 살기로 다시 한번 결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