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모르는 모습이 있다
여전히 나도 모르는 내 모습이 남아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뭉클하기도 할 때가 있다.
다른 사람에게 민폐 끼치는 걸 가장 싫어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급할 때는 손도 내밀 줄 알고, 도움받으면 감사하다는 말을 할 줄도 안다.
나는 어떤 장르의 음악은 안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안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냥 모르는 거였다.
아침보다는 밤에 훨씬 에너지가 많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른 새벽에 일어나야 하다 보니 아침이 밤만큼이나 좋아졌다.
예전에 선생님이 이런 조언을 해주신 적이 있었다.
자꾸만 주어진 바운더리 안에서만 맴돌면서 같은 역할만 맡고 있는데 민아씨가 왜 그래야 하느냐고. 언제나 예측 가능한 사람인 채로 늘 같은 자리에 머물 필요는 없다고. 물론 그런 면들을 통해서 많은 것들을 차곡차곡 이뤄왔지만 그게 통하는 시기는 이제 지나갔는지도 모른다고.
'그러니까 이제는 다른 방법을 써봐야 할 때 아닐까요.'
앞으로는 하루에 세 개씩 그동안 안 해봤던 일들을 해보라고 하셨다.
꼭 거창한 게 아니어도 되니까 출퇴근길 바꿔보기, 안 먹어본 음식 먹어보기, 안 가던 동네 가보기처럼 사소한 것부터 의식적으로 해나가다 보면 분명히 그 안에서 느끼는 바가 있을 거라고.
그 약속을 매일 지키지는 않았지만 하루를 마치고 침대에 눕기 전이면 자주 그 말들을 생각했다. 나 오늘은 새로운 거 뭐했지.
사람마다 타고나는 그릇이라는 게 있어서 내가 가진 그릇을 깨버리고 새 그릇을 마련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내 그릇에 담고 있는 내용물들은 바꿔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살았다. 그때그때 내가 원하는 것들을 차곡차곡 넣다가, 이게 아니다 싶은 날엔 다시 비우고 새로운 것들로 채워보는 마음으로.
그리고 너무나 여렸던 그때의 내가 서운해해야 할 사람은, 언제나 같은 자리에 있던 나를 당연하게 여기던 사람들이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런 건 나랑 안 맞을 거야. 아무래도 그 일은 잘 못할 것 같아. 나한테 그런 일은 안 생길 것 같아' 하면서 한 발 내디뎌 보려고도 하지 않았던 지난 날들.
게임 속 캐릭터가 한 판을 깨지 못하면 계속 처음 그 자리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는 것처럼, 아무도 안 지키는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게 나의 역할이라 믿었던 날들이었다. 그 자리가 나에게 너무 소중했던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여전히 내가 모르는 모습이 많이 남아있다.
나라고 해서 언제나 같은 자리에 남아있을 필요도, 늘 같은 역할을 할 필요도 없다.
소중한 건 꼭 하나여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 자꾸자꾸 찾아 나서면 된다. 새로운 모습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