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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ah Jun 15. 2021

괌에서의 새벽 드라이브

뒤돌아보지 않기 vs 지나간 일을 정리하기

요즘 내가 집중하고 있는 두 가지 일은 사실상 정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첫째, 뒤돌아보지 않는 것.

둘째, 정돈되지 못했던 것들을 정리하는 것.



먼저 '뒤돌아보지 않기'에 대해 말하자면, 최근 들어 나는 거의 병적으로 지난 일에 대해 생각하는 걸 싫어하게 됐다. 

좋은 일이든, 안 좋은 일이든 이미 지나간 시간에 의해 발목 잡히는 느낌이 왠지 싫고 과거보다는 그냥 지금에 집중하고 싶다.

내가 '어떤 사람이었다'라고 말함으로써 나를 설명하는 방식보다 '지금 이런 사람이다'로 보여주는 방식이 더 좋다. 



근데 그 와중에 뭘 자꾸 정리하게 되는 계기가 여러 번 생기는 거다. 

처음 시작은 6월 말에 배송 올 컴퓨터를 둘 자리를 만드느라 책상을 정리하는 거였는데 그게 책장, 피아노까지 번지더니 급기야 방을 거의 다 뒤집어엎게 됐다. 


덕분에 하루에 분리수거를 다섯 번씩 왔다 갔다 할 정도로 물건들을 버렸는데, 그러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핸드폰에 들어있는 사진/동영상까지 정리하기 시작했다.



추억이 담긴 물건을 잘 못 버리는 성격 +  지나간 일을 잘 돌아보지 못하는 회피 성향 = 

아이폰 4대 + 핸드폰 3대 + 'icloud 저장 공간이 가득 찼습니다'라는 팝업.


지난 일들을 돌아보는 건 나의 대원칙을 깨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시간을 과거라는 이름으로 퉁치고 무작정 클라우드 안에 묻어둘 수는 없다. 뭘 뒤돌아보기 싫은지 대상도 명확하지 않으면서 괜히 두려운 느낌에 겁부터 먹고 계속 피해 다니고 싶지도 않았다. 


특히 여행 이야기만큼은 살면서 꼭 한 번은 정리하겠다고 마음먹었었는데, 이번에 오프라인/온라인 대청소를 하면서 기겁할만한 자료들을 많이 발견했다. 



열아홉에 일본에 갔을 때부터 매번 해외에 갈 때마다 온갖 팸플릿이며 영수증, 명함, 여행지에서 쓴 쪽지와 일기들, 필름 사진들을 모아 각각의 투명 파일에 넣어두었던 것. 십 년 넘은 것들은 영수증이 하얗게 바래 있었지만 (약간 질린 느낌이었음) 그 당시에 갔던 식당 이름까지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정돈되지 못한 이야기들을 정리하기 위해선 뒤를 돌아봐야만 하는 아이러니. 그렇다 할지라도 정리하겠다 마음먹었기에, 그 투명 파일 중 하나인 괌(Guam) 폴더를 꺼냈다. 




인천 국제공항

비행기 타기 전 커피 한 잔

공항이 사람 마음을 설레게 하는 건 '떠나는 쪽'이 내가 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일 수도 있다. 다른 사람 배웅하는 쪽이 아니라, 떠나는 쪽에 서볼 수 있는 경험은 소중하다.


나라는 사람을 늘 같은 사람 취급하지 않는 것. 시소의 양쪽 자리에 다 앉아볼 만큼 용기를 가지는 것. 연연하는 역할뿐만이 아니라 후련해하는 역할도 꼭 맡아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까지 해외여행을 떠날 땐 늘 비행기표와 호텔비만 결제한 채로 아무 일정 없이 떠나곤 했는데, 물론 게으름도 제대로 한몫했지만 나는 떠나는 날의 그 막막함을 유난히 좋아했다. 


계절이 반대라는 것도 몰라서 한여름에 한겨울 옷만 들고 간 적도, 새벽마다 현지에서 당일에 갈 코스를 찾느라 머리 싸맨 적도 많지만, 그래도 떠날 때만큼은 함부로 후련하고 싶었던 마음 아니었는지.


그래서 비행기 타기 기다리면서 마시는 커피는 항상 약간의 막막함과 설렘과 후련함이 섞여있는 맛이다. 




아시아나 항공 : 인천(ICN) - 괌(GUM)

하늘에서 보는 영화


비행기 타고나서 제일 좋은 두 순간이 있다면 -

하나는 기내 프로그램에 보고 싶은 영화가 마침 있을 때, 

그리고 두 번째는 기내 등이 꺼질 때.


이 두 조건이 만나면 꼭 하늘에 있는 영화관 온 거 같아서 그게 너-무 좋다. 아마 세상에서 제일 비싼 영화티켓 아닐까 싶다.


이 날은 개봉한지는 꽤 됐지만 못 본채로 지나갔던 영화 <너의 결혼식>이 있었다.


'When our path crossed, that was how fate worked'

'내가 승희를 얼마나 원하는지보단 얼마나 적절한 타이밍에 등장하느냐가 더 중요하고, 그게 운명이고 인연인 거다'라는 남자 주인공(김영광)의 나레이션이 좋았어서, 불 꺼진 기내에서 영어 자막을 핸드폰 메모장에 옮겨 적었던 기억. (이 말을 하는 남자 주인공의 이름은 '우연'이라는 게 묘하다.)



영화 후반부에 울컥하게 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상하게 비행기에서는 이런 영화들이 잘 어울리더라.




두짓타니 괌 (Dusit Thani Guam Resort) 호텔

2시간의 새벽 드라이브


괌 공항에 도착해서 두짓타니 호텔에 도착하니 새벽 1시.

이때까지만 해도 내가 곧바로 2시간 더 드라이브를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 날 엄마는 홍콩에서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집에서 짐만 바꿔 오후에 다시 괌으로 떠나게 됐고 (또 게으름 피우다 엄마 스케줄 안 물어보고 급하게 비행기표 샀음) 짐은 많고, 정신은 없고, 고단했던 엄마는 비행기에 휴대폰을 놓고 내리고 말았다. 


우린 그 사실을 호텔 카운터에서 알게 됐고 호텔에서는 곧바로 Gail이라는 직원을 불러줬는데, 그때부터 의도치 않게 Gail과 나의 새벽 드라이브가 시작됐다. 


처음엔 공항에 다시 돌아가면 금방 찾을 수 있겠지 싶었는데, 돌아오는 건 '기내 청소 중인데 그런 물건은 없다'는 말뿐. 아쉽지만 새벽에 직원분을 너무 고생시키는 것 같아서 적당히 포기하려는데 Gail은 나랑 달랐다. 나보다 더 의욕적인 Gail은 휴대폰을 택시에 흘렸을 수도 있다며 공항 직원들과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더니 결국 여러 명을 거쳐 나와 엄마를 태웠던 택시를 찾아냈고, 우리는 택시가 주차되어있는 장소로 가서 차 안까지 뒤져볼 수 있었다. (알고 보니 Gail은 전에 공항 택시 배차 파트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이 날 엄마의 새 휴대폰은 찾아내지 못했지만 2시간 동안 괌의 새벽 풍경은 다 봤다.

새벽의 도로는 얼마나 한산한지, 공항 직원들은 어떤 식으로 택시를 배차하는지, 그 많은 택시들은 어디서 쉬고 교대하는지, 공항 뒤편은 어떤 모습인지. 


그들의 무전기로 '방금 엄마랑 딸 태운 기사 있냐', '흰색 아이폰 봤냐'는 질문이 오고 갈 때마다 미안함과 민망함에 얼굴이 빨개졌지만, 이상하게 이 날의 새벽을 떠올리면 기분이 좋다. 


괌의 첫인상은 

'아이폰을 잃어버린 곳'이 아니라 

'새벽 3시까지 아이폰을 찾아주는 사람이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아침이 다가올 때쯤 베란다 사이로 보이던 바다까지도.



Gail에게 감사한 마음을 담아서 보냈던 메일




P.S. 비행기나 여행, 바다, 드라이브라는 단어와 잘 어울리는 노래 - 김뮤지엄의 281.31km.

https://youtu.be/lBdPqkMAVD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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