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3-02
농장일은 정말 끝내준다. 오늘은 시금치를 기계로 깎으면 컨테이너에 바쁘게 담는, 바쁘기만 하고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을 했다. 그 일도 트랙터의 바퀴가 구멍 난 바람에 남는 시간에는 잡초제거를 했다.
그냥 쭈그려 앉아서 잡초 뽑는 척만 해도 무방했다. 실제로 작업을 시키는 작업자가, 너무 많이 뽑으면 다음번에 뽑을 게 없으니 쉬엄쉬엄하란 말을 했을 정도다.
그 덕에 일본 친구들과 계속 이야기할 수 있었다. 영어 단어가 기억이 안 날 때면 항상 한국어로 중얼중얼한다. "취미", "체력", "유산소 운동" 이런 말을 하면 일본 친구들은 다 알아먹는다. 심지어 발음도 거의 비슷하다. 체력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영어로 한참 풀어 얘기하다가 한국어로 말하니 바로 알아들어서 친구들과 무지 많이 웃었다.
어제 내내 도대체 왜 이 친구들은 나에게 첫 질문으로 운동을 좋아하냔 걸 물었을까를 생각했었다. 나나미는 특히 농구가 취미라고 했다. 우리나라에선 여자가 흔히 가질만한 취미는 아니다. 나도 배우고 싶어 찾아본 적이 있었지만 지방에서는 농구를 배우는 게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나나미는 학교에서 배웠다고 했다. 어렴풋이 공교육의 중요성을 느꼈달까.
퇴근하고 나서는 농장에서 2분 거리에 있는 카페에 갔다. 이 농장이 리치몬드와 가깝다고는 들었지만, 정말 코 앞에 있었다. 쉐어하우스 언니에게 이 카페의 허니케이크가 그렇게 맛있다는 걸 들었다. 언니는 스콘을 좋아한대서 언니 줄 스콘도 포장해서 돌아왔다. 분위기 전환 겸 들렀는데 정말 분위기가 끝내줬다. 예스러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그리고 스콘을 집에 두고, 장을 보러 다시 나왔다. 장을 보러 가는 길에 어떤 강아지가 가만히 잔디 쪽을 보며 주인과 서 있었다. 배변도 아니고 냄새를 맡는 것도 아닌 거 같이,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주인은 그 강아지 유키가 나를 기다렸다고 말한다.
내가 집에 들어가는 길에 저 멀리 해변에서 오고 있던 강아지였나 보다. 그 먼 거리에 있던 나를 어떻게 봤지? 나는 유키를 보지 못했다. 처음 보는 강아지인데, 내가 장 보러 바로 나올 줄 어떻게 알았던 거지? 나에게 인사하고 싶어서 그렇게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강아지가 너무 신기하고 이상했다. 나는 가끔 이렇게 길에서 강아지들과 진한 유대감을 느낀다. 강아지들과도 소통을 하며 함께 사는 기분이다.
페리 표를 바꿨다. 하루 일찍 메인랜드로 간다. 그러면서 태즈메이니아를 한 번 쓱 훑고 나갈 수 있는 여행 계획 루트를 찾아보기 시작한다. 지금 계획으로는 숙소를 따로 잡지 않을 예정이다.
오늘도 역시 해가 뜨는 시간에 출근을 했다. 그 여명을 보며 운전을 하는데 굉장히 가슴 벅찬 노래가 자동차에서 흘러나왔다. 지금의 내 삶이 빛난다고 얘기해 주는 노래였고, 그게 참 황홀했다.
"찢겨진 날개로 추락해. 너에게 비상해"라는 가사가 나왔다.
한국에서 현실에 지쳐 때려치우고 어떤 포부를 품고 이곳에 왔다가, 때려치운 그 과거의 현실에 비해 초라한 지금에 현타가 온다고 하는 사람들을 본다. 오피스 워크를 하다가 서빙, 농장일, 공장일을 하니까 급이 낮아진 것 같이 느끼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전에는 이런 말을 들었다. "워킹 홀리데이를 간다고? 공무원 하다가 왜 그런 무모한 일을 해?"
그러면 이 결정은 어쩌면 추락일지도 모른다. 잘 가던 길을 두고 나는 갑자기 길도 아닌 옆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면 길 위에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말한다. "거기로 왜 가니? 길은 여긴데 거길 왜?"
하지만 이 길이 둘러 가는 길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지름길이었다. 주변 풍경을 둘러보며 가고 싶은 마음에 이 길을 왔는데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길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한국에서 망설이고 생각만 하던 많은 것들을 실현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러니 나는 다른 사람들 눈에 추락처럼 보였을지 모르겠지만 비상하고 있었다. 이 길에 대한 의심은 없다. 분명 내가 지금껏 봐온 수많은 길과 너무 다른 길임에도.
그래서 추락을 너무 두려워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건 알고 보면 비상하는 또 다른 방법일 수도 있으니. 인생은 정말 무궁무진하다. 난 요즘 사는 게 너무 재밌다. 살아간다는 게 축복이란 말이 무슨 말인 줄 알겠다. 아무것도 알 수 없기에 그게 정말 아름다운 것이란 걸 알겠다. 인생이 정말 다이아몬드처럼 빛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