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20.
Paso Robles를 떠나, Solvang, Santa Barbara, Santa Monica를 거쳐 LA까지 들어가는, 가장 장거리 운전이 예정되어 있는 날이다. 1번 국도의 웅장함을 느껴봤기에, 남은 절반의 코스도 우와~ 우와~ 몇 번 하다 보면, 도착지까지 남은 시간이 뚝뚝 떨어지겠지.
계획은 이랬다. 우선 캘리포니아의 유럽 도시 Solvang에 들러 덴마크식 베이커리로 브런치를 먹고, 예쁜 기념품 인당 하나씩 사서 여행 기분 한껏 끌어올린 다음, Santa Barbara 해변에서 파르페 한 잔씩 하며 ‘넌 꿈이 뭐니’류의 아이들 극혐 대화 좀 나누고, Santa Monica 해변에서 석양을 보며 펄떡이는 랍스터를 몇 마리 뜯고, 코리아타운에 있는 한인민박으로 이동할 야심 찬 계획이었다. 한 달 계획을 시뮬레이션해봤을 때, 가장 기대가 되는 코스 중 하나였다. 오늘은 돈도 아끼지 말자.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구글맵을 통해 네비를 찍어보니 LA까지 논스톱으로 3시간 30분 정도 걸렸다. 이 정도면 촘촘하게 계획된 모든 일정 소화가 가능해 보였다. 오케이. 체크아웃하고 캐리어 4개를 차에 테트리스 방식으로 다 싣고, 다시 내비게이션을 찍었다. 3시간 25분 걸린다고 나왔다. 그 사이 5분 줄었네. 나이스.
자, 출발. Paso robles는 살짝 내륙 쪽이라 바닷가 해안 도로까지 나가야 했다. 나랑 목소리가 비슷한 김동률의 ‘출발’ 음악이 흘러나오고, 가사와 풍경이 기가 막히게 어울리는 장면들이 이어졌다.
‘아주 멀리까지 가 보고 싶어. 그곳에선 누구를 만날 수가 있을지. 아주 높이까지 오르고 싶어. 얼마나 더 먼 곳을 바라볼 수 있을지~ 작은 물병 하나, 먼지 낀 카메라, 때 묻은 지도 가방 안에 넣고서~’ 노래를 따라 부르며 카메라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들던 순간, 지우가 시크하게 말했다. "아빠, 조용~! 그냥 노래 듣자~!"
다시 주변을 봤다. 20분 정도를 달렸는데, 아직 1번 국도와 해안이 보이질 않는다. 생각보다 내륙 쪽으로 많이 들어왔었구나. 이때 불현듯 스치는 불길한 예감. 머리카락 와이파이를 삐쭉 세워서 동서남북을 스캔해 봤다. 이상한데? 우측에 이제 해안가 느낌이 나야 하는데, 계속 산들이었다. 역시 미국이 넓은 건가. 지도상으론 1번 국도까지 찔끔 이었는데, 이렇게 멀다니. 그렇게 10분을 더 운전하다가 싸한 느낌 하나가 내 뒤통수를 때렸다. 헉, 이 길이 아닌가?
손가락 두 개로 내비게이션 화면을 오므리며 주변을 확인을 해보니, 아름다운 해안가 1번 국도가 아니라, 우린 내륙을 통과하는 5번 국도를 타고 내려가고 있던 것이다. 계속 1번 국도로만 안내하던 구글맵이 아침에 출발하던 딱 그 순간, 5번 국도가 5분 더 빨리 도착한다고 길을 바꿔 안내해 준 것이다. 난 당연히 구글 형님이 안내해 준 최단코스로 운전을 하고 있었고.
아놔, 짜증이 밀려왔다. 여기선 해안가로 빠지는 길은 없었다. 30분 왔던 길을 유턴해서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가는 길 밖이었다. 한 시간을 날리더라도 예정된 행복 코스로 갈까 잠시 고민을 했는데 아이들이 그냥 가자고 아우성이었다. 무조건 빠른 길로 가자고. 수학 시간에 두 점 사이의 최단거리를 구하는 문제만 풀어봐서일까, 낭만이 없어, 낭만이.
Solvang, Santa Barbara, Santa Monica, 새로운 풍경에 호들갑 떨고 설레기로 되어 있던 뜨거운 가슴, 모두 안녕~
5번 국도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같았다.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사막 지대였고, 힘세고 오래갈 것 같은 트럭들의 주요 경로였다. 양 옆에선 과연 한 차선에 들어가긴 할까 싶은 무시무시한 트럭들이 쌩쌩 지나다녔고, 트럭들은 서로 경쟁하 듯 바퀴에 날카로운 칼들이 장식되어 돌아가고 있어서 옆으로 올 때마다 움찔움찔했다. 뜨거운 사막을 가로지르는 이 도로에서 차가 멈춰 버리면 금세 계란 후라이가 되어 단백질이 필요한 근육 도마뱀들의 밥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중간에 휘발유만 한 번 넣어주고 LA까지 걸음아 날 살려라, 쭈욱 달렸다. 중간에 한 구간이 대책 없이 막혀서 예정 시간보다 한 시간이 더 걸렸다.
Paso Robles 출발 4시간 반 만인 오후 2시에 LA에 입성했다. LA는 한국이라 봐야지. 지난 일주일 느끼할 대로 느끼해진 아이들의 소화기 내장들을 달래 주고자, 코리아타운의 박대감이란 갈빗집으로 향했다. 4명이라 갈비를 3인분 시켰더니 두 접시 가득 담겨 나온 압도적인 양에 깜짝 놀랐다. 이게 3인분 맞냐고 물었더니, 한국 기준으로 생각하면 안 된단다. 한국에서 2인분이 여긴 1인분이라고. 미리 말씀해 주시지.
오래간만에 불판에 지글지글 구운 갈비의 맛이라, 캬, 한국사람 맞네. 너무 맛있다. 아이들도 숨도 안 쉬고 고기를 흡입했다. 양 작기로 유명한 우리가 불가능해 보이던 3인분을 다 먹게 되다니. 코리안 바비큐는 글로벌 경쟁력도 있구나. 우리 옆 테이블에 샤킬 오닐처럼 생긴 사람 4명이 앉아서 갈비를 먹는데, 고기 쟁반이 끝도 없이 들어갔다. 오늘이 저분들 치팅데이였겠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먹으면 사람 죽어요.
고기를 다 먹고, 생각지도 못한 후식 전쟁이 벌어졌다. 지우는 된장찌개, 지아는 김치찌개를 외치며 한참을 싸웠다. 이미 고기로 양이 너무 많이 오버해서 하나만 시키자고 한 것이 잘못이었다. 둘 다 시켜서 하나씩 먹는 것도 중재안이 되지 못했다. 그건 또 싫단다. 지영이와 난 너희들이 해결하라며 이 전쟁에서 중립을 선언했다. 결국 박대감 찌게 전쟁은, 오늘은 지아가 양보하고 여행 끝나기 전 다시 한번 여기 와서 그때는 된장찌개를 먹기로 했다. 타협안 도출 과정이 나쁘진 않았다. 다만 막대한 예산 집행이 필요한 이곳에 또 와야 하네. 아이들과 지영이만 좋다면 세 번도 못 오겠냐.
오늘의 숙소 LA PAUL HOUSE라는 한인민박집에 도착했다. 지금껏 라폴하우스라 읽고 있었는데, 생각해 보니 LA 폴 하우스인 것 같았다. 리뷰들을 읽어보니 이곳은 조식으로 한식이 나온다고 했다. 여행 2주 차쯤 되면 아이들 한식 금단현상이 올 것 같아서 무려 이틀이나 이곳을 예약했는데, 박대감 고기와 찌게 냄새를 폴폴 풍기며 들어오게 되다니.
민박집에 짐을 풀고 Hollywood거리로 갔다. 90년대 남포동 거리처럼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LA 시내는 주차 지옥일 줄 알았는데 군데군데 Public Parking이 있어서 오히려 편했다. 5번 국도 분노의 도로에서 기를 다 빨렸으니, 일단 당 충전부터 하자. Ben & Jerry’s에서 아이스크림을 두 개 샀다. 나도 먹고 싶었지만, 콘 하나에 만 원이란 가격에 움찔하기도 했고, 아주 높은 확률로 3분의 2쯤 먹었을 때 ‘아빠도 먹을래?’ 할 것 같아서 그 타이밍만 기다렸다. 예상대로 눅눅해진 콘 꼭다리 두 개는 모두 내 몫이었다.
우린 호기심 많은 비글 네 마리가 되어 Hollywood 거리를 산책했다. 양복 입은 경호원 형님들이 모여 있는 곳이 보이면, 브래드 피트라도 오는 건 아닌지 까치발로 서서 구경했다. 들어가 보고 싶은 곳들은 많았지만, 난 의결권이 없지. 아이들이 가자고 콕 찍었던 line friends 매장으로 들어갔다. 미키 마우스, 도널드 덕의 도시까지 와서 라인 친구들을 꼭 만나야겠냐. 그래도 가고 싶은 곳이 있으니, 중간에 돌아가잔 말도 안 하고 앞장서서 치고 나가는 모습이 감사할 따름이다.
라인 프렌즈 입구의 덩치 아저씨가 내가 가진 1리터짜리 생수통을 보더니, 매장 내에서 절대 마시면 안 된다고 주의를 주길래, 아기처럼 꼭 안고 있겠다고 했다. 근데 아저씨 어제 혹시 박대감 안 가셨나요? 끝없이 먹던 그분 같은데.
매장 내에 bts 멤버들의 핸드프린팅이 걸려 있었다. Suga, J-Hope, Jimin, Jungkook 등 이름만 알고 얼굴은 모르는 친구들, 국위 선양한다고 고생 많다. Suga가 Sugar가 아니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애들 선물 하나씩 사서, 덩치 아저씨와 인사하며 라인 프렌즈를 빠져나왔다.
관광객의 코스, 스타들의 이름을 거리 바닥에 프린팅 해 놓은 walk of fame을 지나갔다. 송강호, 이병헌 등 국내 배우 이름을 찾아보며 떨어진 동전이라도 줍고 싶었는데, 노안 탓에 동전 줍기에 실패한 후 주차장으로 돌아갔다. 이번 여행에서 굳이 한 번 차가 털린다면 여기가 아닐까 싶었는데, 차는 무사했다.
또 하나의 관광객의 코스, 산 중턱에 적혀 있는 Hollywood sign도 봐야지. 내비게이션에 Hollywood sign을 치고 안내해 주는 대로 따라갔는데, 차들이 빼곡히 막혀 있는 길들을 마주 보며 우리 차만 텅 빈 도로를 질주했다. 운전 경력 25년의 감으로, 이건 뭔가 잘못된 거지. 내비게이션이 길을 잘못 안내해 주는 것이 확실했지만 아 몰라, 그냥 계속 가봤다. 산을 오르고 올라 목적지에 도착했더니, 여긴 그 유명한 그리피스 천문대가 아닌가. 오늘이 휴무일이라 우리의 LA 일정에서 지웠던 곳을 이렇게 우연히 오게 되다니.
휴무일이라 천문대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주변 풍경만으로 충분한 곳이었다. 안 왔으면 아쉬울 뻔했네. 그러고 보니 저 멀리 Hollywood sign이 보이긴 했다. 내비게이션이 오전에 5번 국도로 안내한 것이 미안해서, 복잡한 곳으로 꾸역꾸역 가지 말고, 천문대도 구경하고 사인도 보라고 이곳으로 안내해 준 것일까. 소오름.
이곳을 찾은 모든 사람들이 라라랜드의 배우들이 되어 즐겁게 사진을 찍고 있었다. 다 비켜라, 한국의 라이언 손슬링이 여기 왔다.
그리피스 천문대에서 사진 백 장씩 찍고, 코리아타운 한인마트로 향했다. 우리 동네 오렌지 마트 사이즈를 예상했는데, 이마트급이었다. 상품도 없는 것 빼곤 다 있었다. 내일을 위한 간식거리들을 사서 LA 폴 하우스로 돌아왔다.
밤에 작은 소란이 있었다. 지영이랑 지우랑 말다툼을 했다. 지영이가 지아는 어리다 치고, 지우는 이번 여행을 좀 적극적으로 임해줬으면 했는데, 너무 소극적으로 다니는 듯 보여 아쉬움에 한 마디 했는데, 지우는 오늘 밥도 잘 먹고 사진도 잘 찍어주고 나름 잘 다녔는데 왜 엄마가 한 마디 하는지 모르겠다고 지지 않고 언성을 높였다. 엄마는 꼭 오늘 일만 가지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여행 온 이후 계속 그렇게 느꼈다고 하자, 지우는 또 열폭했다. 아빠 냄새 때보다 더 화를 냈다. 보통 두 사람의 말다툼은 오래가지 않는데 이번엔 점점 수위가 높아졌다.
어떤 형태로 건 다툼은 마무리 짓고 넘어가는데, 이번엔 두 사람의 감정이 극한으로 치달았고, 마무리가 안된 상태로 지영이가 그냥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지우는 동상이 된 것처럼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었고, 지아도 침대에 누워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렇게 20분이 흘렀다. 난 이 시간 동안 지우의 분노 게이지가 점점 커져 폭발할 줄 알았다. ‘왜 이야기 끝내지 않고 샤워하러 갔냐’부터 따질 것 같았다. 난 눈을 지그시 감고 폭발하는 두 화산 사이에서 어떻게 타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머리를 굴려 보기 시작했다.
지영이가 샤워를 끝내고 나오니, 지우가 나지막이 엄마를 불렀다. 원래 낮은 톤이 더 무서운 법이지. 그런데 이어지는 말들도 차분하다 못해 온화했다. 본인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거 이거는 본인이 잘못한 것 같다. 그 부분은 본인이 사과를 하고 싶다. 근데 이런 이런 부분은 조금 억울하다. 나도 이런 부분은 기분이 나빴다. 그래도 엄마한테 대든 건 내가 잘못한 것 같다며, 아주 차분하고 조리 있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사춘기 소녀가 고성이 몇 번 오갈 상황에서도 이렇게 차분하게 성찰해 보고 먼저 사과하다니. 우리 딸 참 잘 컸다. 지영이도 그렇게 이야기해 줘서 고맙다며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답게 따뜻한 대화를 이어나갔다. 와, 이렇게 훈훈하게 마무리되는구나.
그제야 지아가 입을 열었다. 평소와 다른 두 모녀의 데시벨에 잔뜩 걱정을 하고 있었나 보다. 지아는 침묵의 20분 동안 두 사람 싸우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는데 하나님이 들어주셨다고 배시시 웃으며 이야기했다. 와, 우리 지아, 이런 상황에서 기도를 하구나. 우리 딸들 너무 훌륭하다.
이 장면은, 내게 이번 여행 통틀어 가장 인상적이었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5번 국도 시작은 미약했지만, 끝은 창대했던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