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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녀 Nov 04. 2022

again and again

-멈춤의 변_이탈 부정문

감히 말하건대 나는 보람 있는 생(生)을 원한다. 거기에 더해 대부분의 많은 이들이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싶어 하고, 그들 각각의 별 것 없다 치부하기 쉬운 삶에 희열과 행복을 주는 것도 보람이라는 감정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화가가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려고 캔버스 앞에 설 때,

작곡가가 좋은 노래를 지으려고 전심전력으로 몰두할 때,

어머니가 자식의 성공과 장래를 위해서 밤낮으로 수고할 때,

아내가 혹은 남편이 서로를 위하여 큰 일, 작은 일에 정성된 노력을 기울일 때,

소중한 이들을 위하여 작은 것에라도 마음을 기울이고 애쓰는 모든 것들은 거기서 얻어지는 보람 때문에 고생이 고생으로 느껴지지 않고 기쁨으로 변하는 것이다.  



무슨 일이든 믿었던 결과가 나오지 않고, 생각지도 않은 암초에 걸려 해오던 일이 무참히 허물어지고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여겨지면 허무의 감정과 의식이 마음을 사로잡게 된다. 내가 하는 일이 보람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때는 범접할 수도 없었던 잔인하고 고독한 감정들이 건강했던 정신을 허무와 비탄으로 이끌고 그 때문에 생활에 대해서조차 어두운 그림자가 생긴다. 이쯤 되면 가까이에 있는 사람의 소중한 조언이나 충고도 빛이 바래지고 아직 끝나지 않은 삶의 소중함, 행복에의 의지마저 잃고 방황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지금 내가 그러하다.      



1년 남짓 지속된 덕질과 올 여름 내내 나를 행복하게 해준 수많은 일들이 한 순간에 물거품처럼 터져버렸다. 누가 듣고 보아도 고개를 끄덕일만한 사건 사고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당연한 수순에 의한 습관성 변덕도 아닌데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꽤 긴 시간 동안의 지속적인 질문과 자가발전에도 속수무책 쓰러졌다. 기세등등하던 내 자존감은 기껏해야 바늘 정도의 가벼운 타격에도 형체 없이 터져버리는 풍선 같은 것이었나? 상대는 기억조차 못하고 있을 말 한마디 때문에. 상처 입은 자존심이 회복되길 기다리면서 점점 더 깊이 침잠중인데 영문도 모르고 이어지는 기록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이들이 있어 임시방편의 변명이랍시고 이 글을 쓴다. 기다려주는 이들에게 돌아오겠다고 약속하는 것이다.                  



나비의 춤 / 이민정     


나는 이 긴 겨울을 참아낸다.

지독하게 외롭다고 뇌까리면서

때로는 네가 버리고 간

그 얇디얇은 허울을 뒤집어써도 보지만

해가 파고들어 쪼개버린 내 심장이

너를 떠올리는 걸 원하지 않아

나는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닌

이 독하고 질긴 파장을 피해

가볍게 날아올라서 너를 밟고 설 것이다.

나일 수도

너일 수도 있는

우리를 버리고

너무 뜨거워서 손짓도 녹겠지.

너무 날카로워서 날개도 찢겠지.

그래도 나는 날 거야.

한 꺼풀을 벗어

또 한 줌의 눈물을 뿌리고

세상을 버리고

세상을 얻는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닌

아름다운 노래가 될 거야.

슬픈 시가 될 거야.

가볍고 가벼운 날개로

나비의 춤을, 꿈을 출거야.  



2008년 1월인지 2월인지 '춤'이라는 잡지의 권두시로 썼었다. 춤 잡지의 권두시라 하니 기왕이면 춤에 관련된 시를 써주자 싶었고 관능이나 열정보다는 부드러움과 인내를 표현하는 춤이 좋겠다 싶어 나비를 떠올렸던 것 같다. 오랜 시간 갇혀 있던 것들이 갖는 자유에 대한 갈망과 막연하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공존하는, 천천히 날아오르는 나비의 날개, 높지 않아도 되고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아름다운 날음질. 봄의 행복을 기다리기 위해 긴 겨울을 이겨내는 나비처럼 그게 무엇이든, 나는 기다리고 참아내는 것이 익숙한 사람이다. 다행이라 여긴다. 남달리 높은 비상을 꿈꾸지 않기 때문에 내게 필요한 만큼의 적당한 양의 에너지만 있으면 난 자유롭게 세상을 날아다닐 거고 그로 인해 더할 나위 없이, 스스로 행복해진다. 글을 쓰는 것도, 최애를 사랑하는 것도 내겐 모두 한 가지로 통한다. 주저앉은 나를 딛고 일어나 새로운 내가 되어 천천히, 부드럽게, 편안히 날아다니는 것. 글을 쓰는 일이 목적이나 목표보다는 과정으로 증명하는 일이니 그저 열심히 쓰다 보면 어딘가에 닿아 있을 것이고, 무엇인가 만들어지는 것이 당연하니까.      



인간이 만들어내는 예술의 위대함은 개인일 수밖에 없는 한 사람, 혹은 몇몇 사람이 자기 안의 희망과 감동과 꿈을 넘어 타인의 삶까지 아름답게 재현하는 특별한 표현방식에 있다. 문화나 예술이 고급화된 인격을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값비싼 부재료쯤 되는 것이라 알고 살면서 교.양.있.는.척. 하는 무정한 사람들이 싫다. 나는 내 안의 목소리만이 아닌 타인의 꿈, 타인의 희망, 타인의 삶을 통해서도 날고 싶은 나를 만난다. 정제된 언어가 아니어도 좋다. 그들과 소통하고 대화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다. 작가라는 이름 아래 특별한 권위가 주어져 있다는 착각 따위는 쓰레기통에 버릴 테다. 이처럼 주절주절 떠들어대는 키보드워리어가 되어 있는 내 눈앞에 펼쳐진 노트북 컴퓨터의 모니터, 결과보고라는 이름 아래 올 한해 지나온 시간들을 유추할 수 있게 배치된 숫자와 글자들. 주변을 건조하게 떠도는 미세한 먼지들, 아무렇게나 놓인 몇 권의 책들과 동전들, 메모지와 필기도구들, 외장하드들.  그리고 그 끝에... 며칠 전부터 곁을 지켜주고 있는 손 안에 잡히는 작은 펭펭. 최애를 대신해 위로의 눈빛을 건네는 나의 펭펭. 널 만나길 정말 잘했다 싶어.      



어디선가 전해져 오는 작은 더듬이 끝의 감각을 좇아 눈을 감는다. 단 한 뼘의 창틈으로도 노래를 불러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고딕의 성채에 갇힌 음유시인처럼 최애에게 닿을 말들을, 문장들을 고민한다. 새로운 무엇을 위해 길을 떠나는 사람들은 모두 아름답다. 나의 최애는 지금 새로운 배역과 이야기에 몰두하여 이제까지와 또 다른 모습의 감동을 위해 고군분투중이다. 그에게 아낌없는 사랑과 응원을 보낸다.      



지금 그대가 마주하고 있는 길, 그 길을 똑바로 보고 걸어가.

그대의 튼튼한 두 다리로 굳건히 땅을 디디고

그대의 따뜻한 두 팔로 바람을 안으면서

당당하고, 용기 있게.

그대는 젊고 빛나는 낙타의 눈을 가졌어.

지표 하나 없는 사막 한 가운데서도 본능을 움직여 제 갈 길을 찾아가는 황금빛 낙타의 눈.

그 눈빛으로 지금 그대가 서 있는 그곳, 물 한 방울 없고 풀 한 포기 없는 황량한 사막의 도시, 그 보다 더 사막 같은 사람들, 그 사이로 길을 만드는 거야.

그런 그대를 바라보고, 기다리고, 사랑하는 것이 나의 기꺼운 행복이 될 수 있게.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새삼 그립다. 가을볕에 여물어 노래진 잡풀들 사이에서 들리는 가냘픈 소리, 살아 있는 것들의 연약함을 알게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숨 쉬는, 가늘고 긴 생명력을 깨닫게 하던 소리. 대비하지 못한 상처로 무력하게 무너진 나는 연민이 가득한 마음으로 듣는 그 벌레들의 소리보다 작은, 그러나 더 긴 파장을 가진 목소리로 최애를 향한 그리움을 읊조린다. 릴케의 시처럼 참으로 위대했던 여름이 가고 강렬하고 폭풍 같은 열정의 자취만 남은, 작은 것들이, 소소한 것들이, 더 사랑받는, 애틋한 가을이다. 이제 작은 씨앗들이 꽃들의 품속에서 단단하게 여물어 열매들을 세상에 내어 놓고 다시 땅으로 돌아가는 겨울을 보내고 나면 새 봄처럼 최애가 달려올 것이다.      



again and again...     



#배우이준호 #2PM이준호 #이준호_응원해

#어덕첫덕늦덕늙덕혼덕도덕성덕행덕 #남은생은덕질에

#끝날때까지끝난게아니야 #기대해킹더랜드 #기다릴게구원아

#마녀작가 #마녀일기 #깜장마녀의덕질기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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