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하균 그리고 김원봉
일제가 내건 현상금 100만 원, 현재 돈으로 환산하면 320억이 걸린 사내가 있었다. 일제가 역대 최고의 현상금을 내걸고 치를 떨며 쫓았던 사람, 1919년 11월 만주에서 결성된 항일무장독립운동단체 '의열단'의 주축 멤버, 그의 이름은 바로 '약산 김원봉'이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우리 역사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일제의 심장부를 노리는 항일 무장 독립운동단체 '의열단', '조선의용대'에서 맹활약했음에도 기록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일제 강점기 23번의 폭탄 의거와 일제 요인 암살 배후에 언제나 약산 김원봉이 있었음에도, 그를 기억할 수 있는 참고자료는 현재 미흡하고 미비한 실정이다.
MBC <기억록> 질문한다. 의열단 의백, 조선민족혁명당 의장, 조선의용대 대장, 광복군 부사령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및 군무부장 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우리 독립 운동사에서 많은 활약을 했음에도 그의 존재가 지워진 이유에 대해 파고든다. 왜 약산 김원봉이 우리 독립운동사와 역사에서 홀대받는지 꼬집니다.
이유는 이러했다. 1947년 광복의 기쁨이 한반도 곳곳으로 퍼지던 순간, 약산 김원봉은 취조와 고문을 당한다. 1910년 국권이 일제에 피탈된 뒤로 한 번도 체포당했지 않았던 김원봉은 오히려 해방 후 조국에서 친일파에게 붙잡혀 치욕을 맛보게 된다. 약산 김원봉에게 모욕을 안 겨준 이는 일본명 마쓰우라 히로, 우리말로 노덕술. 약산은 일제의 앞잡이 이자 대표적인 친일파 형사인 노덕술에게 무참한 고문을 당한다.
노덕술로 대표되는 해방 후 자유민주주의 진영은 약산의 과거 사회주의 경력을 문제 삼아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주변을 경계한다. 그토록 원했던 조국의 광복과 독립을 맛보았으나, 그 맛을 느껴볼 틈도 없이 약산 김원봉은 민족반역자인 친일파의 위협에 시달리게 된다.
그렇게 택한 월북. 약산 김원봉은 독립운동가가 아닌 '빨갱이'라는 이름으로 치환되어 남한의 역사에서 먼저 지워진다. 북에서도 마찬가지. 북한의 정치적 노선 갈등으로 약산은 얼마 지나지 않아 숙청당한다. 남에서 지워지고, 북에서도 김. 원. 봉. 이 세 글자는 다시 또 지워진다.
그래서 남아있지 않다.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파들이 훈장을 받고, 출세의 길을 달리는 사이, 약산을 기억할 수 있는 자료와 사료는 북과 남 어디에서도 제대로 찾아볼 수가 없다. MBC <기억록>은 그렇게 대답한다. 더 늦기 전에 기록해야 하지 않느냐고, 더 늦기 전에 기억해야 하지 않느냐고, 약산 김원봉에 대해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