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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코포니 Dec 20. 2021

CHAPTER 3 REPRISE

카코포니 'Reborn' 작업기 

<Life Note>


사랑받기 위해서, 내가 가진 것들을 하나하나 버려 나갔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려고 노력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가지기 위해 애를 썼다. 그게 설령 나와는 정반대의 것일지라도. 나는 열심히 나의 개성을 거세시키며 사람들을 만족시켰다. 


친구들이 많아졌다. 사랑을 받았다.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주제를 나도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고, 어느 부분에서 웃어야 그 사람이 기쁜지 알게 되었다. 내가 가진 탁월함이 불편함을 줄까봐 멍청한 척을 했고, 별로 공감하지 못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전교 1등이었는데 별명은 바보였고, 잘 놀다가도 집에 오면 이유 없이 참 많이 울었다. 진정한 감정에서 우러나온 반응이 아니라, 학습된 반응으로 사람들과 관계를 맺었다.  



그렇게 친구를 사귀었고, 그렇게 성인이 되었고, 그렇게 연애를 했다. 

하지만 그것이 우정이었고, 그것이 성숙함이었고, 그것이 사랑이었을까? 


나를 보여준 적이 없는데. 나는 한 번도 나였던 적이 없는데. 


이제 나는 내가 누구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나를 평생 잃어버리며 살아왔다. 내가 느껴야 할 감정이 무엇인지, 내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다 잃어버렸다. 내가 무엇을 좋아했는지 무엇을 싫어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삶을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삶을 포기하고 있었다. 아, 내가 흘러내리는데 도저히 잡을 수가 없다.


사람들은 나에게 웃어준다. 심지어 나를 좋아한다. 그러면 다 해결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복잡하다. 나를 반복해서 버리고 나니 내가 텅 비어버렸다. 너무 비어버려서 어떻게 채워야 할지 모르겠다. 참혹한 빈 집이다. 아무 가구도 없는 빈 방에서 감정들은 어디에 자리할지 모르고 안절부절 거리기만 했다. 


아픈 것 같다. 오랜만에 생생한 감정이 느껴진다. 아프다. 



그래서 나에게 내가 이렇게 살았던 것을 후회하냐고 묻는다면, 침묵하겠다. ‘후회’의 개념과는 좀 다른 것이기 때문에. 이 삶은 나에게 마구잡이로 주어졌다. 소화할 틈도 없이 나는 그렇게 살아야만 했다. 후회의 여부를 묻는 것부터 이상하게 느껴진다. 애초에 선택할 수 없었다. 


만약 ‘후회한다.’라고 말한다면, 내 모든 어린 시절이 가여워진다. 그렇게 악착같이 사람들에게 맞춰온 내 노력이 모두 의미가 없었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그래서 후회하지는 못한다. 그저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을 뿐이라고 변명하고 싶다. 


그렇다고 ‘후회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도 없다. 어린 나에게 이 삶의 방식은 가혹했으니까. 분노의 방법도 몰라 혼자 썩히고 썩혔으니까.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지금 내 삶의 방식을 모욕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떤 말도 못 하겠어서, 노래에서도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목소리를 낼 뿐. 



노래가 끝나고, 가면을 쓴 나에게로 찾아온 별의 요정과 손뼉 치기를 하며 논다. 기이한 웃음소리가 나는 음악에 맞춰 함께 가면을 쓰고 춤을 춘다. 이 과정을 전부 웃어넘기고 나서야 나는 가면을 벗는다. 




<Music Note> _ Become

https://youtu.be/W9lQXBE7Nns 


Become은 가장 늦게 완성한 곡이다. 원래는 피아노에 보컬만 있는 아주 짧은 곡이었는데, 악기도 많이 추가되었고 길이도 길게 늘어났다. 보통 곡을 처음 쓰고 편곡 방향을 많이 틀지는 않는 편인데, 이렇게 큰 변화가 있는 건 특이한 일이었다. 


편곡이 많이 바뀐 계기는 5월쯤에 한 라섹 수술이었다. 수술 후에 눈이 정말 너무 아팠다. 시각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감각을 전환시켜야만 했다. 그래서 노래를 정말 많이 들었는데, 이때 머릿속에서 Become 편곡 방향의 완전히 바뀌었다. Vangelis의 곡을 특히 많이 들었다. 반복 속에서 층층이 쌓여 가는 악기가 만들어내는 그의 풍부한 사운드에서 많은 감동과 영감을 받았던 것 같다. 


수술의 고통에서 벗어나자마자 바로 작업을 했다. 사실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는데도 그려지는 그림이 너무 분명해서 컴퓨터 앞으로 서둘러 갔던 기억이 난다. 당장 실현시키고 싶었다. 떠오르는 음악이 너무 분명해서 작업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사운드로는 가장 심혈을 기울인 곡임이 분명하다. 악기마다 사운드를 정말 많이 만졌다. 조용한 곳에서 집중하며 들어보면 디테일한 소리 변형이 많이 들릴 것이다. 


편곡 마무리 단계에서 작업실에 놀러 온 베이시스트 철순님이 이 노래를 듣고 참여하고 싶다고 하셨고, 덕분에 저음 부분이 좀 더 풍부하고 탄탄해졌다. 믹스와 마스터링까지 거치고는 정말 이 노래가 내가 만든 노래인가 싶었다. 사람들에게는 가사가 없다 보니 별로 반응이 없는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Reborn 앨범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다.



이 곡의 모티브는 두 번째 삶의 ‘태아’이다. 양수 속에서 언어도 모른 채로 과거의 기억을 더듬는다. 사운드적으로도 양수 속에서 따뜻하게 부유하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저음부를 강조하여 따뜻한 느낌을, 몽환적인 보컬 트랙들로 물속에 있는 느낌을 주었다. 초반부터 반복되는 벨소리는 미지의 공간에서 부유하는 분위기를 형성한다. 뒤의 곡 ‘저주’에서 나오는 벨소리와 연결감을 주면서도 전혀 다른 역할을 하고 있다. 


나는 가사 없이 노래를 부른다. 언어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언어를 배우기 이전의 사람으로 돌아가 다시 태어날 준비를 한다. 첫 번째 삶을 침묵시키고 두 번째 삶의 태아가 되어 양수 속에서 노래한다. 


첫 번째 삶을 가지기 위해 내가 탯줄로 영양분을 받았다면, 두 번째 삶을 얻기 위해 나는 첫 번째 삶의 기억들을 영양분으로 삼는다. 무의식 속에서 나의 불안과 외로움의 이유를 더듬더듬 찾는다. 외로움의 반복이었던 나의 첫 번째 삶. 이를 표현하기 위해 쓸쓸한 멜로디를 계속해서 반복한다.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다른 악기들이 서서히 쌓여간다. 외로움의 기억들이 비슷한 모양으로 겹겹이 쌓인다. 하나씩 쌓여가며 완벽하지는 않지만 내 삶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보인다.


때로는 어떤 한 기억에 오랫동안 머무르며 쓰다듬는다. 피아노와 보컬만 남았다. 첫 번째 삶에서도 인정하기 싫지만 아름다운 기억이 있었다. 오래 안아준다. 오래 쳐다본다. 이 삶이 아프기만 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다시 기존의 멜로디로 돌아온다. 악기들이 더 쌓인다. 기억들이 더 쌓인다. 드디어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기존의 멜로디를 벗어나 멜로디가 상승한다. 더 이상 외로움이 반복되게 두지 않는다. 나는 이 삶의 방식을 등지기로 결심한다. 이 기억들을 밟고 일어서서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드러난다.



첫 번째 삶에서 두 번째 삶으로 넘어가는 경계선에 Become이 있다. Become 이전의 곡들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억압 속에서 발생한 자기혐오를 바탕으로 쓰였다면, Become 이후의 곡들은 타인의 시선으로 만들어진 이 세계를 의심하고, 분노도 하고, 그 세계로부터 해방되는 의미를 갖는다. 나는 Become을 통해 내면을 가리키던 부정적인 감정의 방향을 외부로 돌릴 준비를 한다. 


나는 더 이상 나의 삶을 이대로 두지 않을 것이다. 




카코포니 EP & 영화 [Reborn] 작업기 매주 월요일, 금요일 연재합니다. 


카코포니 영화 [Reborn] 감상하기 

https://vimeo.com/ondemand/cacophonyreborn   


카코포니 영화 [Reborn] 프로그램북 확인하기 

https://url.kr/qjt2f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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