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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코포니 Jan 07. 2022

CHAPTER 5 REBORN

카코포니 'Reborn' 작업기 

<Life Note>


분노가 끝이 나고 나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이 무대를 벗어날 수 있을 줄 알았다.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그다지 강하지 못했다. 나는 이 세계에서만 살아왔고, 이 세계를 위해 온 몸과 마음을 바쳤다. 아는 것이라고는 정말로 이게 전부였다.


한 발자국 나갔다가, 멈칫한다. 저 너머의 세계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겠다. 무섭다. 어둠이다. 아무리 끔찍할지라도 이미 수십 년을 살아온 세계인데 좀 더 버틸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다시 발자국을 원래대로 되돌린다. 타협한다.  몇 년이 지난다. 내가 혐오스러워져 용기 내어 몇 발자국 더 나가본다. 


내가 이 삶을 버리고 나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가 나를 지킨다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일까, 모두 다 적당히 맞춰 살아가는 게 아닐까. 나만 유난을 떠는 걸까. 



분노는 이미 예전의 것이었다. 나는 그대로 다시 돌아와 익숙한 삶을 선택한다. 편한 방식으로 살아간다. 그들의 사고방식을 이번엔 내가 스스로 나에게 주입한다. 어느 순간 나는 그 어느 때의 나처럼 사회가 요구한 가치를 획득하기 위해 도서관에 앉아서 공부하는 나를 발견한다.


아니, 오히려 더 심해졌다. 책은 더 두꺼워졌고, 앉아있는 시간은 더 많아졌으며, 더 큰 압박감에 시달렸다. 근데 우스운 게 공부에 집중하고 있으면 진정한 삶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어서 마음이 편해졌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 모여 스터디를 하고, 기출문제를 분석하고, 인강을 듣고, 학식을 먹고. 나도 비슷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엄마의 건강이 더 안 좋아졌다. 공부는 포기하고 간병을 시작했다. 엄마와 대화를 했다. 엄마는 여전히 아팠다. 엄마를 이해하게 되었다. 엄마는 잠을 더 많이 잤다. 음악을 해야겠다 생각이 들었다. 엄마의 마지막 숨을 보았다. 1집을 만들었다.


그토록 어렸을 때부터 하고 싶었지만, 제대로 해낸 적 없는 음악을 이제야 토해내며 만든다. 아무 생각 없이, 아무 걱정 없이 그저 만든다. 내 안에 사실 모든 게 있었으니까. 아무것도 몰랐지만, 그래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 이 세상을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길이 만들어진다. 그 길을 걸어 당당하게 나온다. 그리고 내가 나오지 못해 두려웠던 이 세계가 사실은 너무나도 초라했음을 마주한다. 엄마의 삶을, 나의 삶을 마주한다. 



나는 나의 지난 세계를 등지고 앞으로 달려 나간다. 문득 알고 있었다. 이렇게 용기를 내어 뛰어가는 사람이 나뿐만이 아닐 것이라는 걸. 자신의 세계를 파괴하고 다시 만들어내는 가엾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뛰어나가는 동안, 내가 살아가야 할 삶이 나의 몸 안에 이미 있었음을 깨닫는다. 나의 발걸음을 느끼고, 나의 숨소리를 느끼고, 나의 음악을 느낀다. 내가 만날 너를 느끼고, 내가 사랑할 너를 느끼고, 꿈이 아닌 현실의 너를 느낀다.


나로 나는 걸어간다. 

다시 태어난다. 






<Music Note> _ 계속

https://youtu.be/nyRSI0chCMk 


유일하게 Reborn 앨범 중에서 내가 편곡하지 않은 곡이다. 내가 해보려고 노력했는데 잘 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곡이었는데 자꾸 촌스러워졌다. 수록곡 중에서 곡이 어떻게 가야 할지 머릿속에 유일하게 그려지지 않았다. 포기하고 완기오빠한테 연락했다. 


완기 오빠랑은 2집 때 처음 같이 작업을 했다. 그때도 ‘제발’이라는 곡이 도저히 편곡을 혼자 못하겠어서 편곡자를 찾던 중 믹스를 해준 은정언니가 어떤 노래를 들려줬는데 끔찍하게 좋았다. 그래서 만든 사람을 소개해달라고 했고, 무턱대고 문자를 보냈다. 그렇게 만났다. 


‘계속’ 편곡을 맡길 때는 별 이야기를 안 했던 것 같다. 아니 못했다. 분명한 그림이 그려졌다면 사실 내가 했었겠지만, 이상하게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았으니 전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별 말을 안 해도 마음을 써서 잘할 것 같아서 그랬던 것 같다. 사실 안일한 생각으로 클래식하면 좋지 않을까 싶어서 클래식하게 해달라고 했는데, 시간이 좀 지나서 비요크처럼 가야겠다고 답변이 왔다.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중간에 들려주지도 않고 거의 다 끝낸 후에 파일을 보내줬다.


처음 들은 기분은 뭐랄까, 충격적이었다. Reborn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의 완성을 내가 아닌 사람이 더 잘 완성시켰을 때의 기분이란. 이 순간을 떠올리기만 해도 소름이 돋는다. 듣자마자 어떻게 이 반주에 노래를 해야 할지가 머리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브릿지부분은 없었던 부분인데 만들어 놨더라. 왜 만들었는지도 어떻게 부르라고 전혀 말하지는 않았는데, 거기에 어떤 가사로 어떤 멜로디로 불러야 할지 바로 그려졌다. 


‘난 더러워지지 않으리

난 주저앉지 않으리

계속해서 태어나리

계속해서 살아가리’


고마웠다. 편곡을 받고 나의 세계를 공감해주는 사람이 있음에 극진한 위로를 받았다. 사실 이 곡 외에도 여러 곡에 피아노로 참여해줬고, 그 외에도 예술세계를 많이 자극시켜 준 덕분에 이 앨범과 영화가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도 모르게 가장 외로울 수 있었을 곳에 무심하게 있어줬다. 


타이틀곡이라고 말을 안 하고 편곡을 맡겼었는데, 타이틀곡으로 한다고 하니 완기오빠가 굉장히 당황했었다. 타이틀곡은 다른 걸로 하라고 나에게 끊임없이 제안했지만, 나는 잘 무시했다. 자기가 만들었으면서 이 곡을 좀 마음에 안 들어했는데, 뮤직비디오와 Reborn 영화를 보고 내가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 이해가 되어서 이 곡을 인정하게 되었다고 말해줬다. 다행이었다. 



그리고 이 곡은 내가 앨범 중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곡이기도 하다. 이 노래에 맞춰 춤을 춰야 했으니.


안무는 영화에 출연도 해주신 박주현 안무가님께서 맡아주셨다. 함께 연출을 맡아준 도이의 소개를 통해 주현님과 처음 만났다. 그리고 모든 촬영 중에서 '계속' 안무를 가장 처음 촬영해서 급하게 준비에 들어갔다. 가장 중요한 장면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연기보다도 안무 연습을 먼저 시작했다. 


계속 노래에 맞춘 안무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또 한 번 거대한 위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주현님은 이 노래를 들으며 안무를 짤 때, 마치 무당이 된 듯한 기분이셨다고 했는데 정확하게 그 말이 이해가 되었다. 내 이야기를 온 몸에 흐르게 한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나를, 나의 음악을 분명히 제대로 느끼셨구나.' 단 번에 알 수 있었다. 모든 몸짓에 나의 이야기가 있었다. 처음 안무를 보고 혼자 크게 울 수밖에 없었다. 나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은 것 같아서. 하지만 동시에 내가 이런 멋진 안무를 소화해낼 수 있을지 너무나도 두려웠다. 



걱정은 연습할수록 줄어들었다. 주현님은 나를 단시간에 어떻게 움직임을 이어나갈지, 어떻게 공간을 느껴야 할지, 어떻게 힘을 빼고 힘을 주는지를 알려주셨다. 자신을 따라하게 하지 않았다. 대신 나의 움직임을 찾아주려 하셨다. 나에게 그리고 언제나 용기와 응원을 건네주셨다. 


이 막막하게 해내가는 작품 속에서 주현님 덕분에 무너지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주현님과의 연습시간이 참 ‘성스럽다’고 표현하곤 했다. 외우지 않고 내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고, 보는 시선을 생각하지 않고 동작을 해내게 되었다. 아마 이 춤을 배운 것이 인생의 큰 전환점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싶다. 몸을 움직인다는 것이 이토록 아름다운 일이라는 걸, 또 노래하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주현님과의 레슨 외에도 매일매일 연습실에 나가 연습을 했다. 조금씩 동작으로 감정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고, 발끝으로는 공간의 감각을 손끝으로는 내가 만든 분위기를 느끼게 되었다. 내가 이 곡으로 표현하고 싶은 감정이 무엇인지 춤을 추며 더 알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주현님 앞에서 춤을 춰보였을 때, 주현님이 나에게 진정한 예술가라고 내 눈을 보며 말씀해주셨다. 나만의 춤으로 춰냈다고. 본 촬영 때보다도 그 순간을 떠올리면 참 울컥한다. 춤 말고도 나는 나를 믿을 수 있는 힘을 주현님을 통해 받았다. 너무 감사하다. 


나의 삶을 잘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편곡해준 노래에 또 다른 누가가가 만들어준 춤을 추었는데, 

가장 '나'일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했다. 

마치 내가 나레이션으로 했던 대사를 그대로 경험한 것 같았다. 



그리고 또 저기 이 세계를 파괴하러 달려온 자가 보인다. 

우리는 대화를 많이 나누지 않아도 서로 느낄 수 있다. 

서로 알 수 있다. 

서로 사랑할 수 있다. 



나는 이 곡을 통해 다시 한 번 'Reborn' 하였다고 생각한다. 

행복하게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주현님의 안무 노트도 함께 공유한다.



<안무 노트>


거울은 보지 않는다 

by 안무가 박주현


누군가의 삶으로부터 춤을 길어내어 짓는다는 것은, 내가 아닌 그 사람의 역사를 감히 내 몸에 씌워보려는 일이다. 그것은 역사가 뒤얽히고 변형되기를 감수하는 일이며, 오염을 긍정하는 일이자 관계를 책임지는 일이다. 무려 그 사람의 몸으로 추어질 춤을 짓는다는 것─나는 ‘Reborn’을 안무하는 동안 카코포니의 역사 안에 거주해야 하였고,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엄숙한 몸가짐으로 머무르고, 텅 빈 무용실을 메우는 카코포니의 노랫소리가 살을 파고들어 나를 움직이기 시작할 때만을 기다려 야 하였다. 춤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춤은 추어진다. 안무는 밀도 높은 적막을 견뎌내어 마침내 추 어지는 춤을 기록하는 일이다. 


“여자 안에서 발화된 그 무엇이 여자를 태우기 시작한다. 그것은 저절로 발생한, 춤추는 자의 의지로부 터 독립적인 춤이다. 여자의 육체는 자신을 지탱하는 매질을 의식하고, 매질과 호응하고, 매질을 버리 고, 매질을 창조하고, 그 매질을 반역한다. 그것이 곧 춤이다. 여자는 춤을 추기 시작한 이후에야 춤을 추고 있는 자신을 알아차리고, 당황하면서 놀라워한다. 여자는 오직 내면에서 즉흥적인 걸음을 내디딜 용기를 냈을 뿐인데! [...] 왜 추는가? [...] 한번 여자의 몸에 실린 춤은 스스로 추어진다. 여자는 그것 을 알아차린다. 불꽃처럼, 파도처럼 저절로 너울거린다. 그런데 너울거리는 것은 여자의 몸이 아니라 여 자 내면의 말이다. 여자는 자신이 해독하지 못하는 그 말이 마음껏 발화되도록 놓아 둔다. 여자는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춤의 언어에게 자신을 내어 준 매개물이다. 하지만 여자는 멈추지 않는다.” 

배수아(2019), 『멀리 있다 우루는 늦을 것이다』, 워크룸 프레스, 66~67쪽. 


춤은 마침표를 망각한다. 안무는 추어질 때마다 스스로를 배반하며 다시 시작된다. 카코포니에게 요구하였던 거의 유일한 것은 나처럼 추지 말라는 것이었다. 형태가 아니라, 이야기에 집중해야 한다. 보이는 모습이 아니라, 그녀 자신을 움직이게 만드는 힘에 몰입해야 한다. 움직임의 패턴은 힘이 이동하는 경로여야 한다. 걸어 다니지 않고, 내디뎌져야 한다. 나는 제법 그럴싸해 보이는 동작들의 모음집이 아니라, 이야기를 다르게 쓸 수 있는 언어를 주고 싶었다. 그녀가 춤을 출 때마다 몇 번이고 허물어져 다시 태어나는 세계를 나는 보았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거울은 보지 않는다. 눈을 감고 춤을 기다린다. 



카코포니 EP & 영화 [Reborn] 작업기 매주 월요일, 금요일 연재합니다. 


카코포니 영화 [Reborn] 감상하기 

https://vimeo.com/ondemand/cacophonyreborn   


카코포니 영화 [Reborn] 프로그램북 확인하기 

https://url.kr/qjt2f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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