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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대호 May 21. 2016

체코의 화가 알폰스 무하(Alfons mucha)-1

Dobrý den, Praha - 체코의 모든 것.

01. 물음표


유럽 여행이 매력적인 이유 중 하나는 교과서에서만 봐왔던 작품들을 실제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각국의 미술관을 찾아가게 됩니다. 미술에 대한 관심이 깊던 깊지 않던. 한 시대를 풍미한 유명한 화가의 작품들을 보기 위해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렇다면 체코를 여행하는 (혹은 계획하는) 우리는 그곳에서 어떤 화가와 미술작품을 만날 수 있을까요?


오늘날의 무하를 있게 한 '지스몽다' 공연 광고 포스터 (1894) ⓒhttp://www.muchafoundation.org

1895년 새해 파리의 길거리. 파리 골목골목마다 아름다운 여성을 그려 넣은 공연 포스터가 걸립니다. 주인공은 파리 최고의 배우 사라 베르나르. 새해를 맞이하여 그녀의 새로운 공연 소식을 알리기 위한 포스터로 파리 시내가 들썩입니다. 지나가던 시민들은 포스터의 파격적인 스타일과 아름다움에 매료되고 한 장씩 뜯어가기 시작하죠. 곧 포스터를 구입하려는 사람과 구하지 못해 암거래하는 사람까지 생기게 됩니다. 과연 저 포스터는 누구의 손에서 태어났을까요? 예술의 도시 파리를 들썩이게 한 남자. 그는 아누르보 양식의 대표 화가이자 체코 국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민족주의 화가 '알폰스 무하'입니다. 그를 소개해 드리기에 앞서서 아르누보에 대해서 이야기해드리겠습니다


아르누보란 프랑스어로Art Nouveau, 새로운 미술을 일컫습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반짝 성행했던 이 양식은 유럽 전통 예술에서 벗어나 자연에서 따온 곡선으로 회화뿐만 아니라, 건축과 가구 장식까지 삶 깊숙이 파고들어야 한다는 예술 문화를 말합니다. 무슨말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현대에까지 깊숙하게 자리 잡고 있는 대표적인 아르누보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여성들의 패션 필수 아이템 스카프, 점을 볼 때 쓰는 타로카드 그리고 어렸을 때 즐겨보았던 일본 애니메이션이 대표적인 아르누보 양식이라 할 수 있죠.

아루느보 양식은 타로카드, 일본 망가, 스카프 등에 영향을 끼쳤다.



무하는 아르누보 양식과 더불어 자신만의 스타일을 창조해 냅니다. 그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 '황도 12궁'입니다. 첫 번째 특징으로는 머리카락에서부터 배경까지 기하학적인 무늬로 나타내었고, 두 번째 특징으로는 해와 달, 별, 식물 등 자연에서 영감을 얻어 표현했습니다. 세 번째 특징으로 다른 아르누보 화가와는 달리 여자를 굉장히 청순하고 아름답게 표현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무하만의 큰 특징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원'입니다. 원은 그림을 보는 사람에게 편안함과 안정감을 주며 신비로운 느낌을 가미해 주지요.

달력으로 제작된 황도 12궁 (1896) ⓒhttp://www.muchafoundation.org



사실 알폰스 무하는 1881년 체코를 떠나 프랑스와 미국에서 주로 활동합니다. 오랜 해외에서의 활동은 그에게 큰 명예와 부를 안겨주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체코보다는 해외에서 먼저 인정받았던 화가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체코의 열렬한 사랑을 받고 있는 인물입니다. 1910년 체코로 돌아온 그는 체코 민족을 위한 그림을 그렸으며, 그것을 의식한 독일 나치의 만행에 숨을 거둔 인물이기 때문이죠. 또한 우리와 가깝지만 먼 나라 일본에서는 꽤 친숙하고 인기가 많은 화가입니다. 오늘날 세일러문을 포함한 일본 망가의 시초가 알폰스 무하라고 볼 수 있습니다. 프라하에 있는 알폰스 무하 박물관에는 일본 망가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펜과 공책을 들고 스케치하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일본에 알폰스 무하 박물관이 있다는 사실.)


그의 이야기를 성장과정부터 1881년 체코를 떠나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이야기그 후 체코로 돌아와 민족주의적인 행보를 보인 이야기로 나누어서 말하고자 합니다. 이 글을 읽기 전에 알폰스 무하에 대한 생각이 '물음표'였다면 이 글을 읽고 난 후에 '느낌표'로 변하는, 그런 멋진 화가 중에 한 명이 되길 기대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할까 합니다.




02. 천재적인 행운아, 알폰스 무하


알폰스 무하 자신의 자화상 (1899) ⓒhttp://www.muchafoundation.org

알폰스 무하는 1860년 모라비아 지방에 이반치체라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예술적 재능을 숨길 수 없었습니다. 걸음마도 떼기 전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것을 알아본 어머니는 항상 아이의 목에 연필을 걸어주며 어디서든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물론 어머니가 무하를 예술가로 키우려고 마음먹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그녀는 무하가 성직자가 되기를 희망했죠. 하지만 어머니의 영향이 대단했던 것만큼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알폰스 무하가 8살에 그렸던 '십자가, Crucifixion' (1868) ⓒhttp://www.muchafoundation.org

  알폰스 무하가 8살에 그렸던 '십자가, Crucifixion(1868)'란 작품입니다. 남아있는 그림 가운데 가장 어린 시절에 그려진 그림입니다. 이 그림에서 나타나듯이 무하는 어머니한테 많은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는 INRL. (Iesus Nazarenus Rex Iudaeorum.), 유다인의 왕 나사렛 예수라고 쓰여있습니다, 골고다 언덕을 상징하는 해골 그리고 예수님의 못 박힌 손과 발. 보통 또래의 아이들과는 다르게 뛰어난 예술적 감각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혹시 주변에 저런 그림을 그리는 8살 아이가 있다면 관심 있게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제2의 알폰스 무하가 될 수도 있을 테니까요.


무하는 미술뿐만 아니라 음악적 재능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넉넉지 않았던 가정 형편에서 성장한 탓에 넷째였던 그에게까지 교육적 지원이 닿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타고난 음악적 재능과 음색은 성가대원으로 활동하며 학교를 다닐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남자라면 찾아오는 변성기 때문에 성가대 생활을 지속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 후 오스트리아 빈의 한 공방에서 일하게 되지만, 그마저 화재 사고로 직장을 잃고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무하는 다른 선택을 하죠.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렇게 떠난 무하에게는 여행에 필요한 시간과 용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이 없었죠.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재능을 한껏 발휘합니다.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려주기 시작했고, 무하의 소문은 삽시간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곧 뮌헨에 한 백작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됩니다. 그는 무하의 후원자가 되기로 결심하였고,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줍니다. 그리고 유학까지 보내줍니다. 무하는 백작이 권한 로마와 파리 중 파리를 선택해 떠나게 됩니다.


파리에서 백작의 지원을 받으며 미술 공부를 하던 무하의 나이가 어느덧 28세로 접어들었습니다. 지원을 받으며 공부는 했지만 특별하게 명성을 얻거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무하는 불안해지기 시작하죠. 점점 지원을 받을 이유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느낀 것입니다. 결국 백작으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게 되는데 편지의 내용은 걱정대로였습니다. 자금줄이 끊기게 되었죠. 그때부터 생계를 꾸리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판화 규격이 무하의 '지스몽다'처럼 길지 않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 찍어서 붙였다.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며 공부하던 그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옵니다. 절친한 친구의 인쇄소에서 일을 맡아하고 있던 크리스마스. 사라 베르나르라는 배우의 공연 포스터 주문이 인쇄소에 들어옵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기간은 전 유럽인들이 쉬는 큰 기념일입니다. 그래서 주문을 맡아줄 사람이 없었죠. 그때 친구는 초짜였던 알폰스 무하에게 넌지시 물어봅니다. 무하는 망설이지 않았고 작업에 착수합니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바로 연극 '지스몽다'의 포스터입니다. 당차게 보여준 완성품은 친구를 기겁하게 만듭니다. 그 당시 포스터 스타일과는 전혀 달랐죠. 길고 좁은 포스터 스타일과 미묘한 파스텔 색상 그리고 피사체의 머리 주변의 '후광'효과는 파격적이었습니다. 마감시간이 코 앞인 그때,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대로 들고 사라 베르나르에게 보여줍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사라 베르나르는 대. 만. 족. 그리고 그녀는 알폰스 무하를 만나 6년 전속 계약을 체결하고, 포스터뿐만 아니라 무대 의상과 무대 디자인, 장신구와 작품 콘셉트까지 맡기며 동업자로서 함께하게 되죠.


사라 베르나르

무하를 알아보고 인생역전의 기회를 안겨준 사라 베르나르의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녀의 안목이 없었더라면 알폰스 무하는 무명 화가에 그쳤을 수도 있었을 테니까요. 매춘부 어머니 밑에서 성장하던 그녀는 수도원에서 성장하게 되었고 연기학교였던 콩세르바투아르에 입학하게 되면서 인생이 180도 변합니다. 19세기 후반 프랑스는 잦은 전쟁과 정부의 빈번한 교체로 혼란스러웠습니다. 이때 고통과 시름에 잠긴 프랑스 시민들을 위해 희생하고 위로해주던 그녀는 큰 명성을 얻습니다. 그리고 빅토르 위고의 시극 <뤼 블라스>의 공연으로 배우로서의 성공을 맛보게 됩니다. 1894년 51세의 나이로 알폰스 무하를 만난 그녀는 이미 파리 최고의 배우였죠. 그녀는 공연 중 오른쪽 다리 부상으로 다리 절단이라는 시련에도 연기에 대한 혼을 식히지 않았습니다. 1923년 79세의 나이로 파리에서 사망하였습니다.


메데 (1898)

여기 사라 베르나르를 위한 또 하나의 공연 포스터가 있습니다. 서슬 퍼런 칼을 들고 섬뜩하게 정면을 향하는 시선. 그리고 밑에는 시체가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인 '메데'라는 작품입니다. 이 이야기는 황금 양털을 찾는 이아손에게 첫 눈에 반해버린 메데라는 한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그에게 황금 양털을 구해주고 사랑을 얻은 그녀는 이아손과 결혼에 골인합니다. 하지만 남편 이아손이 코린트라는 공주 때문에 자신을 버리자 코린트 왕과 공주 그리고 이아손과 낳은 자기 자식까지 죽여버리는 잔인한 이야기입니다. 남편에 대한 배신감에 이성을 잃고 남편에게 복수를 감행한 메데. 무하는 메데 이야기를 바라보고 표현하는 방식이 다른 화가들과는 달랐습니다. 파격 그 자체였죠.


무하가 디자인하고 조르주 푸케가 제작한 사라 베르나르의 뱀팔찌 (1899)

사라 베르나르는 '메데' 포스터 역시 흡족해합니다. 그리고 포스터 속 메데가 왼손에 찼던 뱀 팔찌도 마음에 들어하죠. 무하에게 주문하게 되고 뚝딱 만들어 냅니다. 그는 그림뿐만 아니라 장신구 디자인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사라 베르나르와 함께 했던 공연 포스터 왼쪽부터 'Lorenzaccio' (1896), 'La Dame aux Camélias' (1896), 'Hamlet' (1899)

담배 광고 포스터 'JOB' (1898) - 'JOB'이라는 담배회사가 의뢰한 담배광고 포스터, 곳곳에 'JOB'로고가 숨어 있다.
왼쪽부터 아침, 오후, 저녁, 밤을 나타내는 '하루' 연작 시리즈 (1899)
장식 디자인 '팜플렛' (1901-1902) - 오른쪽 하단에는 페이지 수가 적혀있다.

사라 베르나르를 통해 무하의 실력은 파리 전역에 소문이 납니다. 곧 명성과 많은 부를 얻게 됩니다. 그의 상업적인 성공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팸플릿이죠. 그의 영역은 실내 장식과 가구, 인테리어까지 이어 지고, 디자인에 매료된 사람들의 주문이 쇄도합니다. 주문량은 많아지고 몸은 점점 피곤해집니다. 그래서 아이디어를 내어 제작한 것이 팸플릿입니다. 이 것을 만들면 사람들이 있는 디자인만 골라서 주문하면 될 거라 생각했기에 수고로움이 덜어질 것이라 본 것이죠. 하지만 예상은 빗나갑니다. 오히려 명성을 높이며 주문이 폭발적으로 증가합니다. 고객들은 디자인을 보고 조금씩 다른, 하나뿐인 작품으로 제작해주길 원했던 것이 었죠.



시계방향으로 음악, 춤, 회화, 문학. 사예(1898) - 아름다운 여자들의 모습은 지금의 애니메이션과 흡사하다. 특히 '춤'의 모습은 세일러문이 변신하는 것만 같다.


'CYCLE PERFECTA'위한 포스터 (1902) - 당시에는 파격적인 자전거 광고. 아름다운 여성을 통해 자전거의 성능보다는 아름다운 여성이 타는 자전거라는 이미지를 심어줌.

1900년 파리에 만국박람회가 개최됩니다. 만국박람회에 참여한 국가들은 자신들이 출품한 물품을 통해 자국의 우월성을 드러냈습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서구 열강들의 식민지 합리화가 깔려 있었습니다. (이때 일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서구 열강의 이러한 의도를 재빠르게 파악해 대한제국의 식민지 지배를 서구 열강으로부터 인정받는 계기로 삼습니다.) 무하는 주최 측인 프랑스로부터 인류관의 디자인을 의뢰받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홍보 포스터와 팸플릿 그리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관의 디자인을 의뢰받습니다. 훌륭히 해낸 그는 느꼈습니다. 자신의 명성이 프랑스를 넘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까지 퍼져 있음을. 하지만 가슴 한편이 먹먹해졌습니다. 그들에게 지배받으며 차별받는 고국 체코를 생각하니 말이지요.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오스트리아 전시관 포스터 (1899)

3. 자유로운 영혼의 보헤미안


영혼이 자유로운 보헤미안답게 상업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절약, 저축이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친구의 어려움에 돈 쓰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고갱과 친분이 두터웠습니다. 문명의 거짓이 싫었던 고갱은 타히티 섬에서 갔다 돌아오는데, 경제적으로 궁핍했던 그는 무하에게 의지합니다. 그는 고갱을 진심을 다해 도왔습니다. 심지어 생면부지라 할지라도 고향 사람이라는 이유 하나로 경제적 지원을 해줍니다. 그리고 당장 필요한 돈을 제외하고는 수집품들을 모으는데  돈을 아끼지 않았죠.

왼쪽부터 고갱, 무하, 또 다른 친구, 고갱의 여인  

만국 박람회는 무하에게 새로운 대륙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6년간 동업했던 사라 베르나르의 미국 투어의 성공을 지켜본 그는 또 다른 꿈을 키우게 됐습니다. 더 이상 익숙한 생활, 더 나아질게 없을 것 같은 무료한 생활에서 벗어나 자신의 운을 또 한번 시험해보고자 합니다. 그렇게 미국으로의 새로운 여행을 감행하게 됩니다. 예술가로서의 명성과 경제적인 부를 얻었음에도 그는 또 다른 여행을 떠납니다. 미국으로 말이죠. 미국에서는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그리고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어떤 변화를 겪을까요?




04. 알폰스 무하 만나기


천재는 혼자 빛을 내지 못합니다. 그를 둘러싼 환경이 그를 더 밝게 빛날 수 있게 해주죠. 무하의 이야기를 알게 된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무하는 천재입니다. 기존 상식의 틀을 깨는 예술적 재능이 없었더라면,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과감하게 실행할 용기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그를 만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는 행운아죠. 그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성장할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해주었던 백작과 사라 베르나르가 아니었다면 오늘날의 무하는 없었을 겁니다. 알폰스 무하의 작품들은 다른 화가의 작품에 비해 감상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는 작가의 생애와 그림에 드러난 그의 의도와 아름다움을 느끼면 됩니다. 이 글을 읽은 여러분들이 체코를 여행하고자 한다면 무하 박물관에 가보시길 추천드립니다.

 무하 박물관. 위치:Panska, 7 | Kaunicky Palace, Prague 110 00 , Czech Republ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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