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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언 Jul 15. 2024

사랑스런 미친 개

"Don't tell my wife"

Part 1.

“나는 집에서 걸어 나와서 새주인에게 목줄을 넘겨주고, 그 아이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줬어. 눈도 마주치지 않았지. 내겐 불가능한 일이란 걸 잘 알았으니까. 그리고 그냥 뒤돌아서 떠나버렸어. 내 인생 전체를 통틀어 가장 사랑했던 한 존재로부터. 우리 와이프한텐 비밀이다?” -스탠드업 코미디언 빌 버(Bill Burr), ‘싸이코 개(Psycho Dog)’ 공연 중


몇 년전 빌 버라는 이름의 스탠드업 코미디언의 공연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무대 위의 빌은 후일 그의 아내가 되는 당시 여자친구가 상의도 없이 맹견 한 마리를 동거중인 집으로 데려왔다고 투덜거렸다. 견종은 아메리칸 핏불테리어(American Pitbull Terrier). 미국은 물론 우리나라 동물보호법 제2조 5호에도 명시된, 무려 양국이 인장한 맹견이다. 빌 버란 남자, 학대 경험까지 있는 그 개가 나를 적으로 인식하는 날엔 무슨 일이 벌어지겠느냐고 너스레를 떨었다. 보면서 참 많이 웃었다.


2년쯤 지났을까. 우연히 유튜브 알고리즘에서 다시 등장한 빌 버는 이제 헤어질 결심을 필요로 하게 된 한 존재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2년간 여자친구는 아내가 됐고, 둘 사이엔 아기가 태어났다. 변하지 않은 건 빌의 개 뿐이었다. 그의 반려견은 전주인에 의한 끔찍했던 학대 경험을 끝내 극복하지 못한 ‘미친 개(Psycho Dog)’로 남았다. 다만 이제 헤어질 결심을 요구하는 사랑스런 미친 개가 됐을 뿐.


빌은 이 미친 개와 함께하고자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했다. 수백만원을 들여 전용 트레이너를 고용했고, 집에 손님이 올 때마다 개를 방에 가둔 채 수시로 달랬다. 그 사이 빌 부부의 양가 부모님이 개에게 죽을 고비를 넘겼고, 빌의 친구 중 하나는 기어이 억센 이빨에 물려 피를 쏟았다. 그래도 빌은 좀처럼 이 미친 개와의 헤어질 결심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엔 본인 힘으로 도망칠 수조차 없는 갓난 아기가 그의 인생에 주어졌다. 통제되지 않는 반려 맹견에 의한 신생아 사망 사고가 연일 뉴스 헤드라인창을 채웠다. 빌은 이제 결심해야 했고, 자신의 사랑스런 미친 개를 입양할 세 주인을 수소문했다.


(개를 넘겨준 후)난 화장실에 들어가서 정확히 0.8초 동안 울었어. 감정의 항아리가 잠기기 직전의 찰나에 말야. 그리고 그 항아리를 분노의 선반 위에 올려뒀지. 남자라면 다들 하나씩 갖고 있는 그 선반 위에다 말이야” - 빌 버, ‘싸이코 개’ 공연 중


Part2. 


헤어질 결심의 전제는 사랑과 애정이다. 애정하지 않는 것을 버릴 때 결심이 필요한 사람은 저장강박증 환자 이외엔 없다. 아니, 남들 눈엔 가치 없어 보이는 물건이라도 저장강박증 본인에겐 소중한 보물일테니 이 또한 앞의 전제에 위배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독하게 헤어질 결심을 하는 쪽은 언제나 더 진심이었던 쪽이다.


내가 거쳐온 이별도 그랬다. 회사든, 사랑이든, 가족이든, 차든, 차였든 마찬가지였다. '이게 정말 옳을까'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한 채 독하게 결심한 이별들이 오늘날의 나를 만들었다. 얼마나 나이를 먹어야 이별이 쉽고 캐주얼해 지는걸까. 내 이별의 과정은 종종 추했고 지리멸렬 했다. 그러나 이젠 추한 과정의 불가피함을 인정할 정도로는 철이 들었다.


좀 더 쿨할 수는 없었던거니. 추했던 그때의 나를 단죄하려는 시도 또한 그만두었다. 선택의 결과를 아는 오늘의 내가, 결과를 알길 없던 어제의 나를 단죄하는 건 반칙이다. 인생의 법정에 기소될 수 있는 죄목이란 언제나 ‘그때 그 순간 진심이었는지’에 관한 것들 뿐이다. 기소된 모든 사건에서 나는 무죄다.


Part3.


캄보디아에서 석조 신전 전체를 부술 듯 휘감은 거목들을 본 적이 있다. 문화재 관리 의식이 부족한 캄보디아인들이 사원 주변에 싹을 틔운 나무 몇 그루를 방치했고, 결국 사람 몸통보다 굵은 나무 뿌리들이 거미줄처럼 사원 전체를 휘감았다고 했다. 또한 이 땅의 돌들은 몹시 무르고 연약해서 이제와서 나무를 제거한다면 사원 전체가 폭삭 무너질 거라고 가이드는 부연했다. 헤어질 결심의 시기를 놓친 이들의 풍경이 이렇지 않을까. 한동안 생각에 잠겼던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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