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 예찬] 과거와 현재가 함께하는 골목에서
[서촌 예찬] EP 01: 산책
서촌 3년차. 지낼 수록 정이 들고, 발견할 매력은 많다. 서촌을 살아가는 일상에 대한 에세이.
한국에 귀국한 후 한동안은 떠돌이 생활을 했다. 본가에 있다가 서울로 올라와서는 삼성역 인근에 있는 오피스텔에서 지냈다. 빌딩 숲 사이에서 사는 것은 마음이 편하지 않다. 문을 열고 나오면 테헤란로, 창문 밖으로는 밤이 되어도 꺼지지 않는 회사 빌딩, 점심은 백화점 식품관에서 해결. 없는 것은 없지만 살고 싶은 동네는 아니다. 그 곳은 동네라고 표현하기도 애매하다. 도심 한 복판에 잘못 떨어진 느낌. 팬데믹에 사람이 없는 거리도, 사람이 많아진 거리도 묘한 긴장감이 탁한 공기 속을 계속 맴도는 느낌. 빠르게 걷는 사람들 사이로 아무리 걸어도 뒤쳐지는 것 같다. 봉은사의 부처는 빌딩 숲을 내려다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끔 시간을 내어 선정릉에 가서 초록을 만나야만 약간 진정이 되는 듯 했다.
2020년 9월, 서촌으로 왔다. 첫 인상부터 좋았는데,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대체로 건물들이 좀 낮다는 것이다. 사대문, 청와대 근처라 건축규제가 많아 옛날 집들이 많다. (이제는 어떻게 될런지 모르겠다.) 조금 걸어 광화문으로 가면 다시 빌딩 숲이 시작되지만, 광화문 광장, 청계천, 송현동 부지 등 도심 속에도 나름대로 휴식 공간이 있다. 서촌 골목을 올라가면, 누하동, 누상동, 통인동, 필운동, 부암동 동네 하나하나 숨겨진 보석같은 곳들이 많다. 작은 소품점, 서점, 카페, 음식점, 공방, 갤러리.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그 자리에 있던 한옥과 새롭게 들어선 가게들이 나름대로의 조화를 가지고 공존한다. 서촌에는 가장 오래된 서점도 있고, 기름 떡볶이가 유명하다던 통인시장도 있다. 대단히 고소하고 달콤한 버터 냄새가 나는 스콘가게도 있고, 조금 걷다보면 이탈리안, 프렌치, 마제소바, 삼계탕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은 좋은 퀄리티의 음식점들이 있다. 조금 더 골목을 들어가면 한옥에 자리잡은 위스키바, 와인바, 막걸리집, 수제맥주집이 밤 늦게까지 이야기 꽃을 피우기 좋다.
무엇보다도 이 곳은 산책하기 좋은 동네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산책로들이 있다.
① 사직동에서 성곡미술관으로 이어지는 경희궁 길이 참 좋다. 성곡미술관은 봄날에 가면 특히나 정원 가득한 벚꽃이 아름답다. 전시를 보고 나온다면 정원을 산책하고 성곡미술관 카페에서 여유를 부리는 것이 좋다. 그 골목엔 제법 유명한 카페가 있는데 비엔나 커피로 유명한 커피스트다. 출판사 건물 1층에 있다. 길목 초입엔 갤러리와 루프탑이 있는 멋진 건물이 하나 있는데, 이 곳은 아는 사람만 아는 숨겨진 곳이다. 테라스가 있는 파스타집에서 와인 모임을 가지는 것도 좋다. 그리고 조금 더 걸어 에무시네마에서 길티플레져 같은 독립영화를 한 편 보고는 혼자 걸어오는 어둑한 길에서 생각에 잠긴다. 타파스가 생각난다면 가정집을 개조한 스패니시 레스토랑에 들려 샹그리아를 한 잔 할 수도 있다. 이 산책로는 경희궁과 서울 역사박물관으로 이어진다.
② 광화문에서 조금 더 걸어나와 정동길과 덕수궁 돌담길로 이어지는 길도 참 예쁘고 고즈넉하다. 정동길엔 대한제국 초기에 지어진 붉은 벽돌 건물들이 많다. 카페도, 식당도, 극장도, 교회, 학교도 정동길을 놓고 양 옆으로 가지런하다. 이 곳엔 보석같은 샌드위치 집이 하나 있는데, 가끔 외국식 샌드위치가 생각난다면 치아바타를 꾹 눌러 만든 파니니와 샐러드를 맛볼 수 있는 르풀에 들려보길 바란다. 햇살이 눈부시게 들어오는 이화여고의 라그린, 갓 구운 빵이 지나치기 어려운 라운드앤드도 훌륭하다. 행복한 원격근무가 가능한 환경이다. 연인이 함께 걸으면 어떻게 된다던 속설이 있는 덕수궁 돌담길로 향하면, 이토록 좋은 데이트 코스를 두고 왜 그런 속설이 나왔나 싶었는데 서울가정법원이 길목에 있어서 그렇다고 하더라. 둘이 걷나 혼자 걷나 좋은 돌담길이다. 리에제와플이 있는 골목이 보이면 덕수궁에 도착한다. 황홀한 궁세권이다.
③ 경복궁 역에서 시작하여 서촌길을 따라 이번엔 북쪽으로 조금 올라가보자. 경복궁역 2번 출구에서는 세종마을 음식문화거리가 있는데, 금요일 밤이나 주말이 되면 발디딜틈 없이 줄을 서는 전국구 맛집들이 있다. 유명한 곳은 계단집, 김진목삼, 체부동 잔치집, 안주마을... 서촌의 맛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 적어야 겠다. 안주마을의 끝에서부터 북쪽으로 올라가는 길은 여럿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필운대로로 올라가서 자하문로로 내려오기를 추천한다. 자하문로는 역에서 이어지는 큰 대로변이라 훨씬 더 복잡하고, 필운대로의 골목골목으로 작은 소품점, 문구점, 서점, 공방들이 붙어있다. 멈추지 않고 올라가다 보면 옥인동, 걸어서 효자동까지도 충분히 갈 수 있다. 매번 갈 때마다 "여기 이런 곳이 있었네! 다음에 가봐야지" 하는 곳이 끝임없이 생기는 곳이다. 많이 가봤다고 생각하는데도 아직도 못가본 곳이 많다. 어느 골목이든 좋으니 한 번 들어가보기를 추천한다. 지도를 펼쳐놓고 목적지를 찾기보다도 길을 잃어도 좋으니 궁금한대로, 마음이 가는대로 걸어가도 좋은 곳이다.
④ 조금 더 본격적인 산책을 하고 싶다면 인왕산으로 향해보자. 사직공원 왼편으로 이어진 인왕산로를 따라 걷다보면 단군성전과 황학정이 보이는 곳 사이 건너편 계단을 통해 성벽길로 올라갈 수 있다. 산행을 하고 싶다면 인왕산을 등반하여 초소책방과 수성동계곡이 있는 곳까지 가도 좋지만, 체력적으로 산을 올라가는 것이 부담된다면 성벽길을 따라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경복궁역에서부터는 30분 정도 성벽에 올라가 서울과 남산이 내려다보이는 속시원한 풍경이 펼쳐진다. 이 곳에 살기 전까지는 서울에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다.
⑤ 우습게도 정작 경복궁에 이사와서 경복궁 안에 들어가보질 못했다. 야간개장하면 꼭 가봐야지 했는데, 마지막으로 경복궁에 간 것이 10년은 된 것 같다. 그래, 꼭 가봐야지. 비가 오는 날에도, 화창한 날에도, 분명 경복궁은 좋을 것이다. 대체로 나는 광화문을 지나 국립현대미술관으로 가거나 삼청동길로 바로 향했다. 특히 갑자기 연차나 반차가 생긴 날에는 꼭 현대미술관을 가고 싶어진다. 삼청동과 북촌은 또 묘하게 서촌과 다른 면이 있다. 훨씬 더 규모가 큰 갤러리와 서점들이 많다. 안국역으로 바로 이어지니 동네 사람 보다는 외지인이 많다. 안국역 근처에는 새로 생긴 서울공예박물관과 송현동 부지가 있다. 서촌은 오랜 친구에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을 소개해주고 싶은 곳이라면 북촌은 귀한 손님이 온다면 모시고 싶은 곳. 커피보다는 따뜻한 차 한잔이 어울릴 것 같은 곳이다.
⑥ 한옥이 아니라 빌딩 숲으로, 거대한 인파와 화려한 건물이 그리워 진다면 지체없이 광화문으로 향한다. 물론 광화문엔 교보문고가 있으니 언제든 책 사이로 숨어버릴 수 있다. 새로 개장한 광화문 광장에서는 저녁마다 새로운 행사가 열린다. 공연도 하고 영화도 틀어주고 버스킹도하고, ... 그리고 주말마다는 끊임없는 시위가 열린다. 지난 2년간 지독한 코로나에 사람들이 모이지 못했다가, 이제는 다시 광화문으로, 청계천으로 길고 긴 시위 행렬이 이어진다. 광화문에 있는 외국계 회사, 언론사, 정부청사, 로펌 등에서 쏟아져 나오는 직장인들을 수용해 줄 고급 레스토랑과 바도 이어진다. 포시즌스의 펍과 바는 수준급이다. 세종문화회관은 공연과 전시를 보기에도 좋지만 복잡한 광화문에서 손님을 만나기에도 좋다. 코스요리를 내는 한정식집과 중국집이 많지만, 한 골목만 더 들어가면 노포가 있다. 직장인의 고달픔을 녹여주는 것인지 술과 담배 냄새로 가득한 골목에서는 온갖 기운이 풍겨온다. 조금 더 걸어 청계천 광장을 따라서 산책을 이어가면 금방 을지로다.
서촌 골목길에는 이미 추억이 참 많다. 앞으로의 추억도 많을 것이다. 서울에서 계절을 머금은 곳에 산다는 것이 좋고, 세월을 간직한 곳에 산다는 것이 좋다. 어쩌면 가장 생각이 많은 시기에 이 곳에 있을 수 있어 더 좋다. 서촌 예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