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환 오기 전, 2학년의 나는 심적으로 조금 많이 힘들어했다.
그리고 그건, 나한텐 조금 많이, 생소한 일이었다. 몸이 힘든 거야 익숙했지만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그렇게 심하게 받은 건 처음이었다. 어떤 일이 터지면 악으로 깡으로 버티다가 몸이 파업을 선언하는 타입이었고, 인간관계에서도 스트레스를 받으면서까지 그 관계를 유지하느니 안 보고 만다는 타입이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정신 상태가 타격을 받기 전에 몸이 알아서 고장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스트레스 받는 걸 사치라고 느끼며 커 와서 그 상태가 더 낯설었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내가 왜 그렇게 힘든지 나조차 속 시원하게 설명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공부가 힘들다기엔 복전을 하겠다며 듣기 시작한 언론정보학 강의들은 주전공인 정치외교보다 재미있을 때도 많았고, 1학년 때 힘들었단 핑계로 모유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동아리가 부담이 되는 정도도 아니었고, 대외활동도 한 달에 한 두번 다른 학교 사람들과 콧바람 쐬는 정도였지 결코 힘들다는 소리가 나올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는 힘들다는 소리를 달고 살았다. 그리고 작년 한 해동안 그건 습관적인 감탄사가 아니라 진심 가득한, 얕게 내지르는 비명이었다. 내가 왜 힘든지 알면 더 이상 힘들지 않을 수 있을텐데 왜 힘든지조차 모르니 계속 그 상태였다. 공부도, 사람 만나는 것도 모두 하기 싫어진 상황에서 내가 결국 선택한 건 도피였다. 어디든 떠나겠다며 교환학생에 지원했고, 그런 마음가짐이어서 그랬는지 쉴 거라는 의지 하나로 선택한 워털루 대학교에 오게 되었다.
겨울의 워털루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곳이다. 어차피 집순이인 나는 학교 도서관에서 눈 덮인 캠퍼스의 설경을 감상하며 습관적으로 리딩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습관적'이라는 말이 의식적으로 다가온 후에야 내가 왜 그렇게 힘들어 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해야 하는 일들만 습관적으로, 기계적으로 처리하고 있었다.
분명 처음에는, 기억조차 잘 나지 않는 맨 처음에는,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을 하기 시작했던 것 같은데. 지금 이걸 해야 주말에, 시험 끝나면, 졸업 하면, 나중에, 그때 편할거야. 그래서 내가 하고 싶던 게 뭐였는데? 고작 주말에 폰 부여잡고 뒹굴거리기?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나는 그때까지 습관적으로 하고있던 리딩을 때려쳤다. 그날 정주행한 해리포터 전권은 학창시절에 엄마 몰래 이불 뒤집어 쓰고 손전등 불빛에 의존해 읽었던 해리포터보다 백 배는 더 재미있었다.
이번 학기 내내 해야 하는 일보다는 하고 싶은 일에 열중해서 살았다. 진로에 아무 연관도 없지만, 정확히 그 이유로 하고 싶지만 하지 못했던 동아리들에 가입했다. 근처 도서관에서 읽고 싶은 책을 골라 실컷 읽었고, 밤 새워서 과제를 한 적은 없어도 바느질하다 밤 새우기 일쑤였다. 헤나 연습한다고 방 안에 헤나 특유의 냄새를 풍겨 하루 온 종일 환기를 시켜야 했던 적도 있다. 코바느질이 계속 하고 싶은데 도안이 완성되어 가는게 아까워서 무슨 페넬로페도 아니고 거의 다 된 작픔을 풀어서 다시 뜬 적도 많다. 왁자지껄하고 화려하진 않아도 그런 평화롭고 소소한 일상의 순간순간이 모두 행복했다. 행복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가치인 내게 그건 중요했다.
그리고 그렇게 소소하지만 행복한 일상이 계속되면서 자그마한 욕심이 마음 속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계속 이렇게 행복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한국 가서도 계속 이렇게 공부는 안 하고 취미 생활만 하고 살 수는 없었다. 지금의 생활에서 느끼는 행복은, 꿈처럼 달콤할지언정, 오히려 그래서 유예기간에 불과하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물론 한국에서 불행했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작년의 나는, 불행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딱히 행복하지도 않았다. 한번 행복을 맛 본 사람은 그걸 손에서 놓치지 않는다. 나는 참 오랜만에 찾은 행복을 쉬이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그제서야 다른 의미에서 욕심을 부리며 싫어하진 않아도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길을 내 길이라고 내 자신을 세뇌하며 준비하던 내 자신이 보였다. 좋아하지도 않는 길에 얽매여 있으니깐 당연히 하고 싶은 길이 아니라 해야 하는 일만 하게 되지. 참 바보 같았다. 하고 싶은 일에 돌아 가는 길인데도 왜 굳이 그 길에 얽매여 있나 생각하다가 헛웃음이 나왔다. 아빠한텐 단 한번도 인정한 적 없으면서, 무던히도 아빠처럼 살고 싶어서 내 자신을 몰아붙였구나, 싶어서.
아빠처럼 살고 싶었다. 정확히 말해서, 아빠처럼 행복해지고 싶었다. 만으로 21년, 짧다면 짧지만 그래도 그동안 나는 아직까지 우리 아빠만큼 직업적 행복도가 높은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다. 직업적 만족도가 높은 사람이야 여럿 봤지만 우리 아빠만큼 행복해 하는 사람은 아직까지 없었다. (내가 의치대생에 가진 환상의 8할은 아빠 때문이다.) 내 진로희망이 꽤 여러 번 바뀌는 동안 단 한번도 전문직이라는 큰 범주는 벗어나지 않았던 이유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빠랑 나랑은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걸, 그 사소한 진실을 인정하는데 참 오래도 걸렸구나 싶다. 애초에 문과를 선택했던 그 옛날에, 아니면 최소한 피를 못 보는 성향상 의치대 진학을 포기했던, 그 때에 깨달았어야 하는 건데 오래 걸려도 너무 오래 걸렸지.
그래서 이제 돌아가는 거보단 직진을 해보고자 한다. 사실, 이게 좋은 건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어느 순간부터 안정성이 직업 선택의 최우선적 가치가 된 나를 보며 충분이 현실적이라고, 충분히 시니컬하다고, 상처 같은 거 안 받고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나이브해지는 기분이라서. 이렇게 말랑말랑해져도 되는 건가 싶어서.
하지만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파랑새, 나의 피터팬,
나에게 돌아와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