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이라는 말은 참 묘한 말이다.
Hi라는 의미와 Bye라는 의미를 다 담은 말이 어디에 또 있을까.
사실 나한테 교환을 어디로 가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도피성이었기 때문에 일단 한국만 제발 좀 뜨고 보자라는 생각이 훨씬 더 강했다. 교환학생 신청서를 넣을 때 마지막으로 했던 생각은 어디든 되라였다. 그래서 3 지망인 워털루 대학교에 가게 되었을 때도 무덤덤했다. 주변에서는 오히려 공대가 유명한 대학에 정치외교학 전공생인 네가 대체 왜 가냐며 의아해했지만 내 반응은 한결같았다.
나 다 필요 없고 관악만 떠나면 돼.
그런데도 마지막 날이 되니 감성적이게 되는 걸 보니 생각보다 정이 많이 들긴 했나 보다.
여기 재학생들은 워털루는 소도시라 할 게 없다며 투덜댔지만 나는 그 한적함이 좋았다. 처음 월마트에 갔다가 오는 길에 다음 버스는 30분 뒤에 온다는 말에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우리 집에 가는 시내버스 배차 간격이 정확히 그 정도여서 그랬는지 워털루에 도착하고 내내 앙금처럼 남아있던 긴장감이 싹 가시고 집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질색하던 거위도 나는 사실 좋았다. 워털루에는 학교에도 시내에도 거위가 많이 돌아다닌다. 다른 친구들은 거위가 내는 소리도 무섭고 아무 데나 똥을 싸놔서 길을 걸을 때 조심해야 한다는 것도 싫다며 질색했지만 나한테 거위는 워털루가 조금 더 편안하게 느껴진 이유 중 하나였다. 고등학교 때 자습을 하곤 했던 집 근처의 대학교에서도 거위를 키웠다. 분명 공부하려고 간 거였는데 소설책 빼들고 창가에서 경치 구경을 참 자주 했던 것 같다. 거위가 길을 건너느라 차가 멈추는 건 거기나 여기나 같았다.
캐나다 사람들은 참 친절했다. 길을 물어보면 데려다줄게! 하고 바래다주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핸드폰을 요리조리 뒤집으며 구글 맵을 보고 있는 것 같으면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다가와서 길 알려줄까? 어디 가려고 하는데? 하는 경우도 많았다. 길치인 나에게 캐나다 도착한 첫날, 유니언 스테이션에서 와이파이를 잡아서 길을 찾고 있자 먼저 다가와서 핸드폰 대리점까지 나를 데려다준 오빠는 아직까지도 어떻게 생겼는지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다. 상담원이든 점원이든 honey, 혹은 sweetie로 나를 불러주거나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면 이름을 물어보고 이름으로 불러주는 것도 좋았다. 모르는 사람이라도 눈이 마주치면 인사를 하며 말문을 트는 것도 좋았다. 공항 줄 혼자서 기다리고 있을 때 앞 뒤 사람들과 수다라도 안 떨었으면 그 시간이 더 길게 느껴졌을 거다.
적고 보니 고작 4개월 있었는데도 그리울 것 같다.
기숙사에서 나오면 매일 보이던, 나무를 쪼르르 오르락내리락하던 청설모들도, 종종 산책하곤 했던 집 근처 공원도, 한 개 듣지 않았지만 항상 친구들과 만남의 장소로 이용해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레고 블록 같이 생긴 학교 건물도 모두 그리울 것 같다. 헤나 디자인을 그리다가 망쳐서 함께 손을 박박 문지르던 친구들도, 말도 안 되는 클레이 캐릭터를 창조해내던 친구들도, 싱가폴 사람이면서 나보다 슈퍼맨이 돌아왔다를 더 잘 챙겨보던 친구들도, 서로 아웅다웅하는 모습이 너무 귀여운 친구들도 전부 그리울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유롭디 여유로웠던 이번 학기의 일상이 참 많이 그리울 것 같다.
어제, 아니 오늘 새벽에 짐을 싸면서까지도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교환 처음 올 때 예상했던 것보다 여행을 자주 다녀서 그런지 그냥 어디 일주일 여행하고 다시 돌아올 것만 같았다. 공항에서 체크인 수속을 하고 이민 가방이 무게를 초과해서 벌금을 내면서도 별 실감은 안 났다. 어차피 여행하면서 짐 부치는 건 다 돈 들었는걸.
그런데 게이트 앞에 앉아 있는 지금에서야 조금씩 실감이 나는 것 같다. 사실 교환학생을 와서 혼자만의 시간을 많이 가지고 생각도 많이 하고 하면 사람이 좀 성숙해질 줄 알았다. 전혀 그런 거 없다. 습관적 찡찡거림도 그대로고(이게 습관적인 건지도 몰랐을 텐데 지금껏 잘 받아준 함께 교환 온 친구에게 무한한 감사를), 톤 높은 목소리도 그대로고, 좋게 포장해서 풍부한 감수성은 더 심해졌다(나는 내가 미술 작품을 보고 눈물 흘리는 사람이 될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오히려 사람이 더 말랑말랑해져서, 그런데도 친구들이랑 굳 바이 할 때도, 짐 싸면서도 눈물 한 방울 안 나서 나 자신을 칭찬해 주고 싶었는데, 공항에서 젊은 여자가 노트북 부여잡고 울고 있으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볼 텐데, 주책 맞게, 정말.
그저께 워털루에는 소나기가 쏟아졌다. 오늘 저녁에 미국 가는 비행기를 타는 친구가 본인이 떠나니 워털루가 슬퍼서 눈물을 흘리는 거라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댔다. 처음에는 미쳤냐며 뭐라고 했는데 계속 듣다 보니 왠지 맞는 말 같아진다.
안녕 워털루, 안녕 캐나다.
보고 싶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