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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모습

아버지의 운동장(백석생활체육공원)-5편

by 난이

1986년 봄,

나는 망토를 두르고 2층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그때 있었던 안전장치는

방치된 낡은 소파뿐이었다.

첫 번째는 정확하게 뛰어내려서 다치지 않았다.

그러나 두 번째 그렇지 못했다.

왼쪽 다리가 부러졌다.


친구들은 황급히 집에 알렸고

삽시간에 아버지는 오셔서

나를 둘러업고 병원으로 한 달음에 뛰셨다.

꽤 먼 거리임에도

쉼도 없고, 느려짐도 없이

입에서는 계속 "괜찮아? 괜찮아! 괘찮아?"를

주문과 같이 반복해서 말씀하셨다.

사실 나는 그 말씀이 내게 묻는 질문인지

아니면 괜찮다는 위로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병원에 도착해서 뼈를 맞출 때의 고통은

부러질 때보다 수천 배 아팠다.

나는 비명을 질렀고 울었다.

그곳에도 아버지가 계셨다.

처음에는 눈을 마주 보며 잘 참으라고 응원했는데

고통으로 신음과 숨소리가 반복되니

차마 보지 못하고 뒤로 돌아섰다.

아마 그랬던 것 같았다.


통증이라는 감각은 비명, 신음 등을 동반했는데

아픔도 거친 소리도 사라지고

눈물만 흘러나올 때도

아버지는 나를 보지 못했다.

대신 내가 아버지의 뒷모습을 봤다.

나를 얹혀 메었던 등 그리고 굽은 어깨...

세상 누구보다도 강한 분이셨다.

국민학교 다닐 때 아버지 그리고 다섯째 누나!

같은 해 1986년 여름쯤 어느 날

아버지는 중풍으로 쓰러졌다.

누나 다섯 명 다음 끝둥이 나의 역할은

아버지를 모시고 산 또는 한강으로 운동가는 것이었다.

아버지와 길을 걸을 때면 좀 많이 슬펐다.

세상 제일 강한 남자가 아버지라서 좋았는데

내가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 싫었다.

아니 동행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는 사실이 더 답답하게 하였다.

누나들은 만약에 무슨 일이 생기면 주변 어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라고

나를 단단히 교육했었다.

그렇다.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 모든 상황이 매일 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하지만 아버지 앞에서는 울기 싫었다.

류시화 시인의 소금별처럼

눈을 자주 깜박거리며 참았다.

운동을 가면 아버지 바로 뒤에서 따라갔다.

보통은 학교에서 있었던 일,

친구들과 이야기한 것,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 등

쉴 새 없이 떠들었다.

말을 멈추면 슬퍼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아버지의 등을 보며 많은 이야기를 했다.


39년이 흘러 2026년 7월 1일, 비가 내리고

아버지의 운동장(백석생활체육공원)을

시계반대방향으로 뛰고 있었다.


빗물은 운동장도 나도 적셨다.

안경은 물방울이 맺혀서 벗어버렸다.

난시로 인해 세상이 흐리고 뿌예졌고

골대 뒤편에 아버지의 뒷모습이 보였다.


반바퀴를 돌면 확인할 수 있었는데

나는 반바퀴를 돌지 않고 멈췄다.

그렇게 나는 아버지를 본 것이었다.

그럼 됐다.

우중주 후 찍은 사진

나는 강한 아버지의 뒷모습도

보호해야 하는 아버지의 뒷모습도

기억하고 있다.


나는 2세가 없다.

그래서 뚜렷하게 각인시켜야 할 대상은 없다.

하지만 그나마도 나를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면

약간의 본보기가 되고 싶다.


나의 뒷모습에는 아래와 같은 것이 담겼으면 한다.

1. 하고 싶은 것이 많음!

2. 그것을 위해 노력함!

난 그렇게 엄청 재미나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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